김창도(金昌道)는 1682년(숙종 8)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원(聖源)이다. 증조할아버지 김상관(金尙寬)이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할아버지는 김광적(金光熵), 아버지는 김수천(金壽千)이다.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집(安楫)의 딸이다. 양부는 숙부 김수기(金壽期)이고, 양모 순흥안씨는 안만성(安晩成)의 딸이다. 재종형이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중 한 명인 김창집(金昌集)이다. 부인 영월엄씨는 엄전(嚴絟)의 딸이다.
1722년(경종2) 3월에 경종 시해를 모의하였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나왔다. 이 고변으로 인하여 역모로 지목된 60여 명이 처벌되는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때 김창도도 죽임을 당하였다. 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인 삼급수 가운데 서덕수(徐德修) · 이정식(李正植)과 함께 독약을 쓰는 소급수를 맡기로 한 죄목이었다.
1722년 조흡(趙洽)이 김창도를 고발하고, 김창도와 사돈 사이인 이정식이 심문을 받으면서 김창도가 독약을 쓴 정황에 대해 진술하였다. 결국 김창도는 5월 13일에 형벌을 받고 죽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김창도 · 이정식 · 김성절(金盛節) · 유취장(柳就章) 등에 대해 무고(誣告)의 죄명을 고쳐서 서덕수와 같은 무복으로 논하였다. 이후 몰수된 가산이 회복되고, 연좌의 죄를 입은 형제 · 처첩 · 자녀 등도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854년(철종 5) 장령(掌令)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