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4대신 ( )

기해기사계첩 중 김창집 초상
기해기사계첩 중 김창집 초상
조선시대사
사건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에 대한 총칭.
이칭
이칭
사충(四忠), 사흉(四凶)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노론 4대신은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명이다. 이들은 왕세제로 책봉된 영조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소론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유배 보내졌고,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묵호룡의 고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며 집권한 노론들에 의해 모두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과천에 이들을 모신 사충서원이 있다.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포장과 환수가 반복되었다.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정의
조선 후기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 때 화를 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에 대한 총칭.
개설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을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화를 당한 노론 측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의 총칭으로, 영조 연간에 정치적 처분을 통해 신원되었고,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연원 및 변천

1720년(경종 즉위) 경종의 즉위 후, 노론 측에서는 경종이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후사가 없자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비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3번째 왕비)의 하교로 연잉군(延礽君, 후일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노론 측에서는 계속해서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권유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고, 영의정 김창집 등이 주도하여 절목을 제정하여 올렸다. 그러나 소론의 조태구(趙泰耈) 등의 반대로 노론 측의 의도는 결국 허사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소론 세력은 앞선 노론 측의 행동이 역(逆)이라 규정하여 정치적 공세를 폈다. 소론 측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1721년(경종 1) 12월 김창집은 거제, 이이명은 남해, 조태채는 진도에 각각 안치되었다. 이건명의 경우는 1721년 10월 청국에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청하러 갔기 때문에 그가 돌아온 1722년(경종 2)에 흥양현의 나로도(羅老島)에 역시 안치하였다.

유배 생활을 하던 김창집 등은 1722년 3월 노론이 세 가지 수단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였다고 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나온 뒤, 같은 해 4월에 이이명, 5월에 김창집, 8월에 이건명, 10월에 조태채가 사사되었다.

내용

경종 연간 소론들에 의해 사흉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던, 노론사대신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원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영조는 1725년(영조 1) 을사환국(乙巳換局)을 단행, 조정의 소론 세력을 축출하고 재야에 있던 노론들을 불러들였다.

정국에 진출하게 된 노론들은 김창집 등을 사대신으로 명명하며 이들의 신원에 주력, 1725년 3월 2일 사대신 모두 관작이 회복되고 국왕이 관원을 보내 치제하였다. 또한 4월 4일에는 이건명에게 충민(忠愍), 조태채에게 충익(忠翼), 이이명에게 충문(忠文), 김창집에게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지자, 8월 8일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유생들이 경기도 과천에 이들을 기리는 사우(祠宇)의 건립을 건의하였고, 1726년(영조 2) 건립되어 ‘사충(四忠)’이라 사액되었다.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들에 대한 포장(襃獎)과 환수 등이 반복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단행되어, 소론 세력이 다시 진출하면서 노론사대신에게 내렸던 시호가 환수되고 관작이 추탈되었으며, 서원도 훼철되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진압된 뒤 영조는 본격적으로 탕평을 추진하기 위한 세력 기반의 구축에 주력, 1729년(영조 5)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발표하면서 4대신 중 이건명과 조태채의 관작을 복구하였다. 이때 김창집과 이이명은 제외되었는데, 이들 후손들이 목호룡의 고변 내용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유처분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입각한 처분으로, 1721년(경종 1)에 있었던 건저와 대리는 노론의 충(忠)으로, 1722년에 있었던 목호룡의 고변과 이어진 임인옥사는 소론의 충으로 판정한 처분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노론과 소론 중에서 완론(緩論)을 끌어들여 탕평파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것이었다.

이후 노론 측에서 관작 복구가 제외된 김창집과 이이명에 대한 신원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그 결과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庚申處分)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관직이 회복되었다. 1741년(영조 17) 9월에는 시호도 회복되었고, 1755년(영조 31) 12월 좌의정 김상로와 병조판서 홍봉한 등의 요청에 따라 사우를 복설하라는 처분이 내려졌으며, 1756년에 복설되었다. 노론사대신 중 김창집은 1778년(정조 2) 영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창집 · 이건명 등 노론사대신은 경종 연간 노 · 소론 당쟁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희생된 노론 측 인물들이다. 이들은 영조 연간 노론 세력에 의해 ‘사충’으로 불리며 충신으로 포장(襃獎)되었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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