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처분은 1729년(영조 5)에 영조가 신임옥사에 대해서 탕평파의 집권 명분 확보와 노·소론의 조합을 위해 내린 처분이다. 이 처분은 조현명, 송인명 등의 탕평세력이 당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쟁점인 신임옥사 문제의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탕평파들은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요구를 역모가 아닌 것으로 규정하고 노론이 요구한 4대신의 복관에서 자손이 연루되지 않은 이건명과 조태채를 신원하자고 하였다. 노·소론 모두 반대하였으나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책을 추진한 영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신임옥사란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발생한 옥사를 통칭한다. 경종 즉위 후 노론 측에서 건저(建儲) 논의를 통해 연잉군(延礽君)이 왕세제로 책봉된 뒤, 이들은 병약한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추진하였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연명으로 대리절목(代理節目)을 제정해서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연차(聯箚)’라고 한다. 그러나 노론 측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소론의 저지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후 소론 측의 정치 공세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1722년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제출되었다. 고변 내용은 노론 측이 세 가지 수단[三手]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노론 계열 신료들이 화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사의 전개 과정에서 왕세제가 이에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연잉군 역시 정치적 곤경에 처하였다. 영조는 즉위 후 정통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혐의를 벗는 것이 중요하였다.
영조는 1725년(영조 1)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 정국을 주도하던 소론 세력에 대신해서 노론 세력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노론의 소론에 대한 정치 보복으로 정국이 혼란스럽게 되자, 영조는 노론에 대해 회유나 위협 등을 통해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노론 세력 내에서 완론(緩論)을 주장하던 홍치중(洪致中)과 같은 세력들을 불러 들여 탕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노력은 노론 측의 강경 자세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영조는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 소론 세력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탕평을 주장하던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 송인명(宋寅明) 등을 모아 탕평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탕평이 추진되는 가운데, 이를 주도하는 탕평파에게 집권 명분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가 1729년(영조 5) 기유처분으로 나타났다. 조문명 등은 노론 내 완론인 홍치중 등의 협조를 받아 노 · 소론의 중요한 정치 현안이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에 착수하였다. 당시 홍치중 등은 1720년의 신축옥사(辛丑獄事)와 1721년의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분리, 임인옥사로 인해 화를 당한 노론 측 인물, 특히 노론 4대신인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김창집(金昌集), 조태채(趙泰采) 모두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탕평파들은 신임옥사의 계기가 되었던 건저 · 대리와 연차를 모두 역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여 노론 측 이건명과 조태채는 신원하되, 나머지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 자손들이 임인옥사와 관련되었기에 연좌를 적용해서 그대로 죄안(罪案)에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탕평파의 이 같은 주장은 당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반대하였으나, 결국 노론과 소론의 조제와 병용(竝用)을 추진하였던 국왕에 의해 받아들여져 기유처분으로 발표되었다.
기유처분은 탕평의 한 방법인 의리의 절충을 위한 양시양비론이 적용된 판정이었다. 이를 통해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