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파 ()

조선시대사
개념
조선후기 제21대 영조 연간에 탕평을 주도하던 집권 세력. 탕당.
이칭
이칭
탕당(蕩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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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탕평파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 연간에 탕평을 주도하던 집권 세력이다. 탕당이라고도 한다. 영조는 즉위 초에 조문명과 송인명 등을 발탁하여 소론을 중심으로 탕평을 추진하였다. 점차 노론 내에서 탕평에 동조하는 홍치중과 김재로 등을 규합하였다. 탕평파는 국왕 주도의 탕평을 보좌하며 중요한 정치적 사안을 처리하였다. 1740년에 임인옥사를 소론의 무고로 판정하는 경신처분이 내려졌고, 1741년에 노론의 명분을 인정하는 신유대훈이 반포되었다. 탕평책으로 붕당 체제가 와해되고 정국이 안정되면서 균역법 등 개혁적 법안이 마련되었다.

정의
조선후기 제21대 영조 연간에 탕평을 주도하던 집권 세력. 탕당.
개설

‘탕당(蕩黨)’이라고도 한다. 영조 연간에 탕평을 주도했던 집권 세력이다. 영조 초부터 국왕의 탕평 추진 의도에 따라 노론 출신의 홍치중(洪致中), 김재로(金在魯)소론 출신의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 송인명(宋寅明) 등 일부를 중심으로 탕평파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729년(영조 5) 이후 탕평파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이미 1731년 경에는 탕당이라 불릴 만큼 세력이 공고해졌다. 1741년(영조 17) 신유대훈(辛酉大訓) 이후 구성원들이 확대되었으며, 영조 대 후반 외척조재호(趙載浩)홍봉한(洪鳳漢) 등을 중심으로 고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지지하고 추진할 세력의 구축이 필요하였다. 이에 자신의 탕평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노 · 소론 내에서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1725년(영조 1) 소론 측 조문명을 발탁한 뒤 소론계 인사만으로 탕평을 추진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낀 영조는, 방향을 선회하여 노론 내에서도 탕평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때 주목한 인물이 홍치중으로, 상신(相臣)에 오른 뒤 노론의 소론 토역론(討逆論)에 대해 국왕의 입장에 편승한 견해를 제시하는가 하면 소론 출신의 송진명, 윤순 등의 출사를 요청하는 등 국왕이 의도한 조제보합적(調劑保合的) 탕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끈질긴 토역 요구에 직면한 영조도 결국 탕평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 소론의 이광좌(李光佐)를 비롯해 조태억(趙泰億) 등을 정승으로 포진시키는 한편, 앞서 발탁하였던 조문명을 이조참의에 임명하였고, 정석삼(鄭錫三)과 송인명을 승지에 배치, 자신의 탕평을 좌우에서 돕도록 하였다

내용

영조 즉위 후 국왕의 주도 하에 추진된 탕평책 하에서 소론 측 조문명과 송인명 등을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탕평파는 조문명, 조현명 형제를 비롯해 송인명과 노론 출신의 홍치중, 김재로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이들은 혈연 및 상호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이들의 결집에는 숙종 대 황극탕평론을 제창한 박세채(朴世采)를 학문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식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국혼(國婚)을 통해 구축된 척신세력이 탕평파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탕평당의 세력으로는 정언섭과 같은 지방 출신 인사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탕평당의 외곽 세력으로 포진하였다,

탕평파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1731년(영조 7)에 이미 탕당의 등장으로 풍문과 절의가 모두 사라져 사람들이 아름다운 관직과 좋은 작위만을 바란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탕평파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1732년경에는 “조송건곤(趙宋乾坤)”이라 하여 마치 조현명과 송인명의 세상이라며 이들의 독주를 견제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비판은 상대적으로 탕평파의 입지가 강화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탕평파들은 국왕 주도의 탕평을 보좌하는 한편, 영조 대 전반기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처리 과정도 주도하였다. 시기별로 각자의 출신에 따라 입장 차이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1740년(영조 16) 탕평파의 주도하에 그동안 신원되지 않던 노론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하는 한편 임인 옥사(壬寅獄事)를 소론의 무고로 판정하는 경신 처분(庚申處分)을 이끌어냈다.

한편 1741년(영조 17) 탕평파의 협조 속에서 신유대훈(辛酉大訓)이 반포되면서 노론 명분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신유대훈은 노 · 소론 양쪽 모두에게 불만을 초래, 양쪽에서 이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노 · 소론 출신 탕평파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신유대훈의 수정은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을 우려한 상황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시기 활동하던 탕평파는 소론 출신의 정우량(鄭羽良)을 비롯해 노론 출신의 원경하(元景夏), 홍계희(洪啓禧), 남인 출신의 오광운(吳光運), 홍경보(洪景輔) 등이 참여하였으며, 그동안 탕평 정권에 참여를 거부하였던 노론 준론계인 유척기(兪拓基)이천보(李天輔)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는 탕평파의 확대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추진된 탕평책으로 정국이 안정되면서, 『속대전(續大典)』이나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국전(國典) 체제가 재정비되었으며, 균역법(均役法)과 같은 법안이 마련되는 등 탕평책의 성과가 가시화되었다.

현황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乙亥獄事)와 심정연(沈鼎衍)시권(試券) 문제로 발생한 옥사를 거치면서 소론은 당색으로 그 의미를 거의 상실하였다.

이즈음 소론 출신의 조재호가 탕평을 주도하였고, 이후 1761년(영조 37) 이후에는 홍봉한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영조 대 후반 홍봉한이 탕평을 주도하던 시기 상신(相臣)에 포진된 인물의 대부분은 홍봉한과 관련 인물들이거나 국왕의 외척이었다.

의의와 평가

탕평파는 영조의 주도하에 추진된 탕평을 지지하고 이를 추진하던 세력으로, 탕평파의 존재는 붕당 체제가 와해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탕평파는 영조대 탕평 정국을 주도하는 한편, 당대에 이루어진 각종 제도 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존재로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대 탕평파의 형성과 벌열화」(이근호, 『조선시대사학보』 21, 조선시대사학회, 2002)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탕평에서 노론탕평으로의 전환」(정만조,『역사학보』111, 역사학회, 1986)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정만조, 『진단학보』56, 진단학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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