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이(大而), 호는 창애(蒼厓).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만종(洪萬鍾)이고, 아버지는 홍중하(洪重夏)이며, 어머니는 정정양(鄭正陽)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영조 3) 정언이 되어 형률시행(刑律施行)의 잘못에 관해 소를 올렸다. 1728년 부수찬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숙종에게 수덕(修德)과 정요(政要)에 관한 6개 조의 소를 올렸다.
1729년 탕평(蕩平)의 폐단을 호소했다가 온성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732년 우승지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어, 인재 등용에서 먼저 역사(逆詐)의 인격을 의심하고 당적(黨籍)에 따라 안배하는 탕평책의 폐단을 다시 상소하였다.
박문수(朴文秀)에 의해 품행이 추장(推奬: 뛰어난 점을 말하고 추천함.)되었고, 승지로서 사대부들의 방납(防納) 폐해를 숙종에게 아뢰었다. 1734년 정월 김약로(金若魯)에 의해 배척을 받았다. 그 해 7월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11월 4일 정사 윤유(尹游), 서장관 남태온(南泰溫)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춘당대(春塘臺)에서 갖는 검사친시(劒士親試)의 불체(不體)를 간청하였다. 1736년 3월 도승지가 되었고, 5월 시법(諡法) 시행의 불성실함을 상소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 인물보다는 당색을 앞세우는 조정의 작태와 무능을 강력히 비난하는 소를 올려 여러 대신들의 노여움을 샀다. 관작을 착출하라는 요구가 뒤따랐으나, 영조는 다시 서용(敍用: 죄로 벼슬을 면한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에 따라 공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740년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듬 해에는 지의금부사·대사헌·경기감사를 거쳐 1743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