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명여(命汝). 정태화(鄭太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재대(鄭載岱)이고, 아버지는 정혁선(鄭赫先)이며, 어머니는 이영(李泳)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회강(會講)시 그의 이름이 누설되었다는 수찬 홍중휴(洪重休)의 상소에 의하여 3년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였다. 1717년 좌랑으로 춘추관을 겸하였으나 곧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병조정랑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사과를 거쳐, 1722년(경종 2) 사간이 되었다. 이 때 공론(公論)에서 죄를 얻었다 하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다시 사간에 임용되었으며, 이 후 승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영조의 즉위과정에 있어서 그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삼사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727년 승지에 특별 임용되어 형조참판·도승지·호조참판·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탕평책의 한 방법으로 전선(銓選)의 바른 시행을 논하였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772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