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질보(質甫).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서문상(徐文尙)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이며, 어머니는 이헌(李藼)의 딸이다. 서명균(徐命均)의 아우이다.
1723년(경종 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727년(영조 3) 7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홍문관에 신록(新錄)되었으며, 이어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이듬해 2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서 군주의 진지실천(眞知實踐)·절검간약(節儉簡約)·복어박소(服御朴素) 및 탕평(蕩平)에 대해 상소했고, 그 뒤 홍문관교리와 이조좌랑·정랑직을 역임하였다.
1729년(영조 5) 4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보임되었고, 같은 해 6월 사간원의 사간으로서 대간과 승지와의 역할 분담을 분명히 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7월에는 조명익(趙明翼)·황재(黃梓) 등과 더불어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그 뒤 응교와 승정원의 승지직을 번갈아 역임했으며, 1733년(영조 9) 12월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부제학으로서 붕당을 없앨 것에 대해 거론하였다. 같은 해 2월 황해감사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을 하지 않아서 면직되었다.
그 뒤 부제학(副提學)·승지·이조참의·경상감사·개성유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739년(영조 15) 2월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부제학이 되었는데 여러 유신들의 곡인소혐(曲引小嫌: 작은 허물을 들어 간곡히 임금에게 청함)에 의해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2월 다시 부제학으로 임용되었다.
그 뒤 대사간·대사헌·대사성·형조참판·예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 24) 7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경주부윤으로 출보(黜補: 좌천)의 명이 있었다.
그러나 부제조(副提調) 유복명(柳復明)이 ‘그는 일찍이 경상감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지금의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윤성(李潤成)은 그의 비장이었던 인물이므로 타 지역으로 이보(移補: 옮겨 제수함)할 것’을 청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듬해 11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우참찬·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한때 이조판서에서 상주목사로 출보되었으나,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그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여 지방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서명빈은 형조판서·이조판서·광주유수·한성부판윤을 역임했으며, 1755년(영조 31) 9월 신만(申晩)·이정보(李鼎輔) 등과 함께 복설(復設)된 찬수청(纂修廳)의 당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4월 영재(營財: 재물에 탐을 냄)를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대사헌을 거쳐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