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부제학, 한성부판윤,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듬해 2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서 군주의 진지실천(眞知實踐) · 절검간약(節儉簡約) · 복어박소(服御朴素) 및 탕평(蕩平)에 대해 상소했고, 그 뒤 홍문관교리와 이조좌랑 · 정랑직을 역임하였다.
1729년(영조 5) 4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보임되었고, 같은 해 6월 사간원의 사간으로서 대간과 승지와의 역할 분담을 분명히 해 줄 것을 주청하였다. 7월에는 조명익(趙明翼) · 황재(黃梓) 등과 더불어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그 뒤 응교와 승정원의 승지직을 번갈아 역임했으며, 1733년(영조 9) 12월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부제학으로서 붕당을 없앨 것에 대해 거론하였다. 같은 해 2월 황해감사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을 하지 않아서 면직되었다.
그 뒤 부제학(副提學) · 승지 · 이조참의 · 경상감사 · 개성유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739년(영조 15) 2월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부제학이 되었는데 여러 유신들의 곡인소혐(曲引小嫌: 작은 허물을 들어 간곡히 임금에게 청함)에 의해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2월 다시 부제학으로 임용되었다.
그 뒤 대사간 · 대사헌 · 대사성 · 형조참판 · 예조참판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 24) 7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경주부윤으로 출보(黜補: 좌천)의 명이 있었다.
그러나 부제조(副提調) 유복명(柳復明)이 ‘그는 일찍이 경상감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지금의 경주영장(慶州營將) 이윤성(李潤成)은 그의 비장이었던 인물이므로 타 지역으로 이보(移補: 옮겨 제수함)할 것’을 청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듬해 11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며, 그 뒤 예조판서 · 형조판서 · 한성부판윤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우참찬 ·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한때 이조판서에서 상주목사로 출보되었으나,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그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여 지방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서명빈은 형조판서 · 이조판서 · 광주유수 · 한성부판윤을 역임했으며, 1755년(영조 31) 9월 신만(申晩) · 이정보(李鼎輔) 등과 함께 복설(復設)된 찬수청(纂修廳)의 당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4월 영재(營財: 재물에 탐을 냄)를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대사헌을 거쳐 판의금부사 · 한성부판윤 ·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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