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리(公理). 정숙(鄭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태구(鄭台耉)이고, 아버지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정필동(鄭必東)이며, 어머니는 박번(朴蕃)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17세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매우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1717년(숙종 43) 사마양시를 거쳐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7년 정언이 되었는데, 그 당시 송인명(宋寅明) 등이 탕평론을 주장하면서도 정론(正論)으로써 역적을 물리칠 것을 논하는 자는 비난하여 당습(黨習)이라 하니, 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봉사(封事)를 올려 이의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신치운(申致雲)·박필운(朴弼雲) 등의 죄를 논책하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김일경(金一鏡) 일파의 죄를 논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었으나, 이듬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영조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여 지평으로 복직시켰다.
1729년 동래부사, 이어 충청도관찰사·동부승지·광주부윤·도승지·한성부우윤·병조참판·삼화부윤·안변부사 등을 지냈다. 이어 호조·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174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도 능하여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전망유해총비(壬辰戰亡遺骸塚碑)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