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옥(伯玉), 호는 임심(臨深). 대사헌 윤번(尹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파천군(坡川君) 윤사흔(尹士昕)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이며, 어머니는 김진손(金震孫)의 딸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사과(司果)로 재직하던 중,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한자급 올려받았고, 지중추부사로 1507년(중종 2) 주문사(奏聞使) 노공필(盧公弼)과 함께 명나라에 가 승습(承襲: 작위나 보위를 이어받음.) 주청(奏請: 아뢰어 요구함.)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뒤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경력이 얕다는 대간의 간쟁으로 체임되었고, 곧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使)로 재직 시 신창령(新昌令)·의산령(義山令) 등의 종친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모의했다는 고변으로 추고당하기도 했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처 구씨(具氏, 영의정 具致寬의 증손녀)가 연산군의 궁에 출입한 추문으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조카인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오르자 외척세력이 커질까 두려워 탄핵받았던 것이다. 그뒤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지내면서 부끄러움과 한탄으로 상심하여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