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황해도감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선원(善元)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5년(명종 20)
사망 연도
1623년(인조 1)
본관
진주(晉州)
주요 관직
동부승지|황해도감사|대사간|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에, 황해도감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선원(善元). 유홍(柳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희택(柳希澤)이다. 아버지는 유전(柳詮)이며, 어머니는 민기무(閔起武)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5년(선조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예문관의 대교·봉교 등을 거쳐 1598년(선조 31)에 함경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앙관직으로 복귀하여 사간원의 정언·헌납을 지내다가, 독향사(督餉使)의 종사관(從事官)의 임무를 띠고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첨정 조존성(趙存性)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사서·예조좌랑·병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의 청요직(淸要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중요한 관직)을 거쳐, 1606년(선조 39)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 임무를 무리 없이 마치고 귀국했다. 이듬해 강원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벌목 노역의 폐단을 없애는 데 노력했다.

그 뒤 병조정랑에 재임명되었고, 장령·사예를 거쳐 광해군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기용된 뒤 사간·장령·필선의 직을 수행하였다. 간관(諫官)으로 재직시 선조의 어의(御醫: 임금의 진료와 치료를 맡았던 의료관직)였던 허준(許浚)의 약 처방 문제의 시비를 논하려다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고, 사헌부집의로 재등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승지 재직 시 지방관의 포상 남발에 대한 규제에 노력했고, 균전사(均田使)로 지방에 파견되어 양전(量田: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황해도감사를 거쳐 대사간·대사헌직을 맡았다. 이때 인목대비 폐비론에 가담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계해역흉(癸亥逆兇: 인조반정에 반기를 들어 주동한 인물)으로 지목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집필자
박홍갑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