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괘서사건은 1755년(영조 31)에 소론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이다. 을해년에 일어나 ‘을해옥사’ 또는 윤지(尹志)가 주도하여 ‘윤지의 난’이라고도 한다. 윤지는 소론으로 영조 즉위 후 집권한 노론이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나주에서 20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윤지는 영조와 노론에 불만을 품은 소론을 모아 역모를 모의하였다. 나주 객사에 괘서를 붙였다가 역모가 발각되어 윤지를 비롯한 소론파 인물들이 사형되었다. 남아 있던 소론파 인물들도 연이은 사건에 연루되며 소론은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을해옥사’ 또는 ‘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숙종 말년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의 세자책봉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로써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 뒤의 영조)이 세제(世弟)로 봉해졌다.
이에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등 소론 4대신은 이를 시기상조라고 따지고 공격하였다. 경종 말년 세제 연잉군의 정무대리(政務代理)까지 강행되었다. 그러자, 소론에서는 승지인 김일경(金一鏡) · 이진유(李眞儒) ·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의 역모를 무고(誣告), 4대신 및 수백 인의 노론 일파가 참살, 실각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노론이 등장하면서 김일경의 옥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소론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때 김일경 부자의 참살은 물론, 윤지의 아버지인 훈련대장 취상(就商)도 고문으로 죽었다. 또한 뒷날 을해옥사의 주역인 윤지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로 유배당하고, 뒤에 나주로 옮겨져 20여년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영조 즉위 얼마 뒤 실세한 소론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1727년(영조 3)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일으켰다. 영조의 왕위 정통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탄(密豐君坦)을 왕으로 옹립한 반란이었다. 한 때 청주를 중심으로 형세가 매우 커졌으나 곧 진압되어 주모자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론은 또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윤지가 적소(謫所)인 나주에서 나라와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해 모의를 계획하고 있었다. 윤지는 아들 광철(光哲)과 함께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및 이효식(李孝植), 박찬신(朴纘新) 등 서울과 지방 각지의 소론을 모으고,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불평분자들을 끌어들여 점차 기반을 구축해갔다.
윤지는 거사 전에 우선 인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1월에 나주 객사(客舍)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고, 푸닥거리로 민심을 현혹시키며 동지 규합에 힘을 썼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괘서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윤지는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으며, 그해 2월에 처형당하였다.
이 때, 박찬신 및 조동정(趙東鼎) · 조동하(趙東夏) · 김윤(金潤)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李匡師) · 윤득구(尹得九) 등은 원찬(遠竄)되었다. 3월에는 조태구 · 김일경 등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
5월에는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과 관련,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沈鼎衍)이 붙잡혀 사형되었다. 이어 춘천에서 윤혜(尹惠) · 김도성(金道成) · 신치운(申致雲) 등이 주모한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 모두 사형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남아 있는 소론파 인물들도 대부분 연루, 실세되어 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론의 역모 주동자를 모두 제거한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여 이 사건들의 시말을 자세하게 밝히게 하였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