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가상(可象), 호는 취촌(醉村)·명발와(明發窩). 아버지는 신제윤(愼齊尹)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어려서는 큰아버지인 신후윤(愼後尹)에게 수학하여 시에 능하였으며,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50세를 전후하여 당한 부모의 상에 상례를 치르는 절도가 엄하였다. 이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서명(西銘: 송나라 장재(張載)가 인애(仁愛)의 원리를 밝힌 글)·태극도설 등의 공부에 골몰하였다.
이재가 죽자, 3년간 심상(心喪: 마음속으로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함.)을 행하였다. 1751년(영조 27) 학행(學行)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천거,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제수되자 “일흔 넘어 첫 벼슬이지만 원량(元良: 왕세자) 한번 뵙는 것이 소원이었다.”하고 벼슬에 나아갔다. 왕세자에게 『서경』을 진강(進講),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뜻을 상설하여 세자의 칭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