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미(公美). 아버지는 부사 신여철(申如哲)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84년(숙종 10) 상신(相臣: 영의정·우의정·좌의정의 총칭) 김수흥(金壽興)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에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나아갔다.
그 뒤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공조좌랑을 거쳐 통진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비를 세웠고, 이어 형조정랑을 거쳐 연안부사로 나아갔다가 친병(親病)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698년 사복시첨정에 올랐으나 이 해에 병으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 작품으로 경주에 있는 「지돈녕부사신경인표문(知敦寧府事申景禋表文)」과 「완산백윤명은비(完山伯尹鳴殷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