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천(而天). 참의 심유(沈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한주(沈漢柱)이고, 아버지는 능주목사 심봉휘(沈鳳輝)이며, 어머니는 홍주국(洪柱國)의 딸이다.
약관(弱冠)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장의(掌議)가 되었다.
1715년(숙종 41)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간행할 때, 윤증(尹拯)이 스승인 유계를 배반했다 하여 심히 배척하였다. 이어 이진유(李眞儒)가 윤증을 비난한 정호(鄭澔)의 발문을 불사르게 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이를 항소하고 권당(捲堂: 성균관 유생들이 불평이 있을 때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관을 비움)까지 하였으나 소론의 득세로 축출되었다.
얼마 뒤 노론의 복귀로 익릉참봉(翼陵參奉)에 등용되었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가 되었다가 설서(設書)로 옮겼다. 그 뒤 부수찬(副修撰)을 거치는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대사간 및 충청·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재식이 뛰어났다고 하며, 삼사에 재직할 때는 직언을 잘 하고 외직에 나가서는 화민정속(化民正俗: 백성들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음)에 힘써 많은 명현과 효자·열녀를 정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