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 · 교리 · 이조정랑 · 응교(應敎) · 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 ·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 · 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 · 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