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지(綏之), 호는 동고(東皐). 세종의 6대손이며, 장선정 이전(李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구수(李耉壽)이다. 아버지는 첨정 이극강(李克綱)이며, 어머니는 온양정씨(溫陽鄭氏)로 정숙(鄭琡)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593년 병조좌랑이 되고, 외직으로 나아가 서산군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라서 수많은 기민(饑民)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친히 창고를 풀어 진휼(賑恤)하고,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항구지책(恒久之策)을 세워 큰 치적을 세웠다. 그 뒤 곽산군수를 거쳐 내직으로 돌아와 세자시강원문학·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02년 서북면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전후의 질서회복에 공헌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1605년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오르고, 통례원상례를 거쳐 다시 외직으로 나아가 광주목사(廣州牧使)·봉산군수·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상의원정(尙衣院正)·봉상시정(奉常寺正)·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1617년(광해군 9) 의정부사인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대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하자 처음 주장하였던 반대의견을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그 뒤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원익·정엽(鄭曄) 등과 교유하였다. 뒤이어 여주목사를 제배받고,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취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