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98년 다시 수찬 · 집의 · 사간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에 신은(新銀) 12만여 냥을 왜에 상매(商買)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승지 · 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 · 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 · 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世子: 뒤위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단암만록(丹巖漫錄)』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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