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망(聖望). 할아버지는 이유담(李維聃)이고, 아버지는 도승지 이하(李夏)이며, 어머니는 민광윤(閔光尹)의 딸이다.
1689년(숙종 15) 통덕으로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에 들어갔다. 1693년 문학·지평·수찬·교리, 의정부의 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04년 소론으로서 활동이 두드러지자 노론의 대간으로부터 논핵을 받았다.
1707년 부응교로 있으면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집의를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내는 동안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과 교유하였다. 그 뒤 1709년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711년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는 때라 또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하는 정치적 고초를 겪다가 풀려 나와, 1721년(경종 1)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듬 해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간이 되었으며, 같은 해 3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따라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의 처단을 강력히 주장하고, 경종 시해를 모의했다는 노론들을 일망타진한 신임사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때부터 소론 중에서 준소(峻少) 계열로 활약하면서 대사성·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도승지 등을 지냈다. 1723년 예조참판·이조참판·대사헌·부제학 등을 역임한 뒤 영조가 즉위하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725년 신임사화의 주동 인물에 대한 삭탈관직의 주장이 일어나고, 노론들의 일대 반격이 가해짐에 따라 탄핵을 받아 절도에 안치되었다. 김일경·목호룡과 함께 사형되고, 부사공신녹권(扶社功臣錄券)도 위훈(僞勳)이라 해 삭탈되었다. 이사상이 지은 경종의 시책문(諡冊文)이 『의릉지장(懿陵誌狀)』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