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흡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오위도총부부총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흡여(潝如)
시호
경목(景穆)
이칭
풍안군(豊安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661년(현종 2)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오위도총부부총관|공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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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오위도총부부총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흡여(潝如). 아버지는 교리(校理) 조수익(趙守翼)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김류(金鎏)·이귀(李貴) 등이 반정을 꾀함을 알고 이에 호응, 포의(布衣)의 몸으로 이천(伊川)으로 가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인조가 즉위하자 등극경과(登極慶科)의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했으나, 얼마 후 파과(罷科)되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어 6품관에 초수(超授), 종부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장례원사평·양구현감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고 형조좌랑을 거쳐 청안현감으로 부임, 치적이 현저하여 현민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어 창평현령을 역임하고, 부평도호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쳤다. 1644년에는 특지(特旨)로 공조참의에 발탁되었으며,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1646년 5월 다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부윤으로 재직 중 술을 폭음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간성군수·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고, 효종 때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다가 1651년(효종 2) 범법자를 다스리지 못하고 탐학한다는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1654년부터 한성부와 도총부에서 거의 7년 간 몸담았다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국조고실(國朝故實)에 밝았고, 저서로 『풍안군일기(豊安君日記)』가 있다. 시호는 경목(景穆)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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