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이조정랑, 부응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화(子和)
지와(止窩)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0년(현종 11)
사망 연도
1718년(숙종 44)
본관
여산(礪山: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주요 관직
이조좌랑|이조정랑|부응교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이조정랑, 부응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자화(子和), 호는 지와(止窩). 송시철(宋時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광순(宋光洵)이고, 아버지는 송징은(宋徵殷)이다. 어머니는 수령 민도(閔燾)의 딸이다. 부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이태좌(李台佐) 등이 천거했는데, 반임(伴任) 때에 정명회(正明會)에서 조의상(趙儀祥) 등과 함께 윤증(尹拯)을 소환하고 송시열(宋時烈)을 핍박,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김진구(金鎭龜)의 반대를 받았다.

1703년 과천현감으로 동작진(銅雀津)의 방화사건을 잘 살피지 않고 모이를 피하고 모면하려고 했던 죄로 파직되었다. 사서·문학·정언·지평 등을 거쳐 1706년 암행어사에 제수되고, 도당(都堂)의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교리·수찬 등을 뽑기 위한 홍문관의 인사 기록)에 올라 교리·부수찬·수찬·헌납·이조좌랑·이조정랑·부응교·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09년 승지에 등용되었으며, 대사간·경상도관찰사를 거쳤다. 이듬해 참핵사(參覈使)가 되었을 때 일으킨 봉사욕국(奉使辱國: 사신으로서 국가 체면을 손상시킴)의 죄로 파직되었다. 대사간·승지·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뒤 호서(湖西)가 흉겸(凶歉)하므로 재차 충청도관찰사를 맡기자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따라 다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대사성·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개성유수로 있을 때 임소(任所: 근무하던 곳)에서 죽었다. 그 곳의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송정명의 덕을 기념하여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집필자
주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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