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안은 조선후기 가주서를 역임한 문신이다. 1752년(영조 28)에 태어났으며 사망일은 미상이다. 남인이지만 같은 남인들이 신봉하던 천주교에 적대적인 공서파에 속했다. 1787년(정조 11) 이승훈·정약용 등이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다는 것을 고발해 정미반회사건을 일으켰다. 1791년에는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 등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고 고발하여 신해박해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쫓겨났으나 다시 권일신·이승훈 등을 천주교 두목이라 고발하기도 했다. 말년에 제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노암(魯庵). 뒤에 이름을 희운(羲運)으로 바꾸었다. 안동 출신. 홍중우(洪重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양보(洪亮輔)이고, 아버지는 홍복호(洪復浩)이며, 어머니는 박상진(朴象眞)의 딸이다.
남인이면서도 같은 남인들이 신봉하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공서파(攻西派)에 속하였다. 1787년(정조 11)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 등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의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다는 것을 이기경(李基慶)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들을 고발해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을 일으켰다.
1790년 증광문과에서 크게 만연하게 될 사학(邪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답안을 써서 병과로 급제, 가주서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진산에서 정약용의 외사촌이 되는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어머니 권씨의 상장(喪葬)에 예를 지키지 않았으며, 외제(外弟)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죄인의 체포와 가택수색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당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는 사학의 무리를 섬멸하라고 재촉해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건의 확산을 바라지 않았던 채제공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단서가 없는데도 홍낙안이 모함할 마음에 사건을 과장했다고 정조에게 간하였다.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고 가주서 자리에서 쫓겨난 뒤 그는 권일신(權日身) · 이승훈 등을 천주교 두목이라고 지적해 신문을 받게 하였다. 권일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배길에서 죽고, 이승훈은 그의 고발이 모함이라고 주장해 석방되었으나, 평택현감의 관직이 박탈되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달레(Dallet,C. C.)에 따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주도로 귀양가서 20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아들 홍원모(洪元謨)도 기해교난 때 천주교를 박해하다가 경원으로 귀양갔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