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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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조선시대 성균관의 사역인들이 거주하던 성균관 동 · 서편에 있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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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성균관의 사역인들이 거주하던 성균관 동 · 서편에 있던 동네.
내용

‘반중(泮中)’·‘관동(館洞)’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일대이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는데, 반촌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반궁은 중국 주대(周代)의 제후의 학궁(學宮)이었다.

1398년(태조 7) 성균관건물이 처음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반촌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 때에 전답 1,000여 묘(畝)와 노비 300명이 성균관에 하사되었는데, 이 노비들은 이미 고려의 성균관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문묘수직·관원사환·관생식사제공 등 각종 사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지리적으로 입역(入役)이 편한 성균관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 때 성균관 입구의 민가를 철거하고, 성균관을 감싸고 흐르는 반수(泮水)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반촌은 이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성균관은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고 공자를 배향하는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순라군과 의금부의 이속들조차도 감히 반촌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시대도 있었다.

반촌 거주민은 반인(泮人)·관인(館人)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6개월마다 번(番)을 나눠 입역하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각기 상업 등의 생업에 종사하였다.

이들 가운데 재인(宰人)이라고 불린 백정들이 도살업에 종사하였다. 성균관의 제사에 소용되는 희생(犧牲)을 잡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으며, 현방(懸房) 혹은 다림방이라고 하는 푸줏간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도살업이 조선 중기 이후 반인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반인들의 도움을 받은 성균관생이 관리로 출세하게 되면, 그 대가로 반인의 현방 영업을 지원하였다. 성균관 동쪽 뒤편의 반촌에는 관리 12위를 모신 숭보사(崇報祠)가 있었고, 광복 몇 년 전까지도 제사를 지냈다.

숙종 연간의 성균관 입역노비는 340호 2,000∼4,000여 명 정도였고, 반인의 인구증가로 반촌은 점차 커져서, 정부에서도 반촌 동쪽의 사섬시(司贍寺) 공터를 제공하는 등 조처를 취하였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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