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

천주교
사건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조상 제사 문제로 발생한 박해.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
이칭
이칭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
사건/사건·사고
발생 시기
1791년
종결 시기
1791년
발생 원인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함
발생 장소
진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단체
없음
관련 인물
윤지충과 권상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해박해는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조상 제사 문제로 발생한 박해로, 신해사옥 또는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진산의 윤지충이 모친의 상을 당해 외종형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체포되었고,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했다. 이로 인해 서울과 충청도에서도 박해가 일어났으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하고 풀려났다. 이 박해를 계기로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중인 이하 신분층이 그들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천주교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배척이 심화되었다.

정의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조상 제사 문제로 발생한 박해.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
배경

조선의 근기 남인 실학자들은 선교사의 전교 없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회원들이 저술한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1784년 겨울 서울에서 한국천주회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그런데 사대부를 전교 대상으로 삼은 예수회 회원들은 동양의 전통 제례인 유교식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례를 자녀와 제자가 죽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상징적 표현이라 간주하고 단지 국민 · 사회적 의례로 보아 허용했다. 따라서 그들이 저술한 한문 서학서에서는 조상 제사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한문 서학서를 바탕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해 온 조선 신자들은 당연히 조상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뒤늦게 중국 선교에 뛰어들어 하층민을 전교 대상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과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은 유교식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례를 선조와 공자를 신적 존재로 섬기는 종교 행위로서 미신 내지 우상숭배로 판단하여 금지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황청은 금지 · 허용 · 금지를 약 100년간 반복하다가 교황 베네딕도 14세(Bendictus ⅩⅣ, 1740~1758) 때인 1742년에 칙서 「엑스 궈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 제사 금령이 조선 교회에 전달된 시기는 1790년(정조 14)으로, 이는 조상 제사를 허용한 예수회 회원들의 한문서학서를 통해 천주교가 이미 지방으로까지 널리 전파된 뒤였다. 즉, 1790년에 사신 행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로부터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사목 주4을 받아와 조선 교회에 전달했다. 당시 조선 교회는 양반 신자들이 지도층을 형성하여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은 조선 교회에 큰 충격이었다. 이에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대책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교황 외에 그 누구도 변경 또는 완화할 수 없는 명령이었으므로 주교는 다른 묘책을 줄 수 없었다.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에 대한 조선 신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는데, 신자들 대다수는 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상 제사를 받들었다. 1794년(정조 18)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천주 신앙과 조상 숭배의 병행이 불가함을 명백히 밝히기 전까지만 해도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따라서 조상 제사를 폐지한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은 신해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경과 및 결과

진산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구베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을 충실히 지킨 몇몇 신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이 전해지자, 주저하지 않고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 1791년 5월에 윤지충의 어머니 권 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정성으로 장례는 치렀지만 혼백이나 신주는 세우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를 중시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이념인 성리학의 입장에 볼 때, 사회의 윤리 강령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패륜적인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그들의 행동은 곧바로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주29’을 제일 먼저 정치적인 문제로 여론화한 사람은 남인 홍낙안(洪樂安)이었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그는 먼저 남인인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글을 보내, 그들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았다고 힐난한 뒤, 좌상 채제공(蔡濟恭)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임금에게 주5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벌주기를 청하면서, 총명하고 재주 있는 선비가 천주교에 많이 물들어 앞으로 주6이나 백련적(白蓮賊)의 난리가 있을 것이므로 사건을 확대하여 그들을 주7 것을 요구했다. 요컨대 홍낙안은 이 사건을 단순히 패륜이라는 인륜적 차원에서 보지 않고 정치적 차원에서 역적 행위로 규정했으며, 나아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 변란을 모의하는 불온 세력으로 간주하고 주10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홍낙안의 편지에 대해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홍낙안은 진산사건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작성하여 사대부와 선비들에게 돌렸고, 남인인 진사 성영우(成永愚)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사대부와 선비들에게 돌려 여론을 환기했다. 이로써 진산사건은 중대한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은 진산사건을 엄하게 꾸짖어 벌주어야 할 비인간적인 패륜 행위로 보면서도 문제가 정치적으로 비화하고 확대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즉, 진산사건에서 진상이 탄로된 사람은 극률로 다스려야 하지만, 단서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까지 연루시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그 파장을 축소하려 한 것은 천주교를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소 아끼던 자파의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사도 요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이 연루되어 처벌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채제공 역시 천주교 교리를 불교와 유사한 주11로 규정하고 평소 주12의 태도를 취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이 체포되어 주13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윤지충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유는 천주교에서 그것들을 금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에서 명하는 바는 곧 대부 대군이신 천주의 명령이므로, 천주교를 믿는 이상 그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내세운 제사 폐지 논리 역시 당시 천주교에서 주장하던 논리였다. 첫째, 잠자는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주14 사람 역시 제물을 주15 수 없으며, 더욱이 음식은 육신의 양식일 뿐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으므로, 조상 제사는 허례라고 주장했다. 둘째, 신주는 생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뭇조각에 불과하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느 물건에 깃들어 있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제공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패륜 행위에 대해 반역죄를 적용하지는 않았으나 주17의 시신을 훼상시킨 행위로 간주하여, 『대명률(大明律)』의 「발총조(發塚條)」를 적용하여 참수할 것을 왕에게 주18. 정조도 채제공과 같은 입장에서 이 사건을 사회 · 정치적 위기로 보지 않고 이단의 패륜 행위로 보아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주19유학을 밝히면 사학(邪學)인 천주교는 자연히 소멸된다는 평소 교화 중심의 이단 방지책을 그대로 고수했다.

그러나 엄벌을 요구하는 유생들과 상하 백관의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오자, 정조는 채제공의 주청에 따라 이들을 사형에 처하게 했다. 또한 주20주21의 중요성과 사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5일간 주22 했으며, 흉악한 죄인을 낳은 진산군을 5년 동안 으로 강등시키도록 했고, 군수 신사원은 신속하고 엄정하게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주23 유배에 처하게 했다. 나아가 이단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서적을 주24 것으로 판단하여, 서학의 소지를 금지하는 동시에 모든 서학서를 관에 바쳐 불태우게 했으며, 홍문관 소장의 서학서까지도 모두 소각시켜 버리게 했다.

신해박해는 진산사건을 일으킨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공서파의 홍낙안 등이 진산사건을 정치문제로 확대시킨 결과, 그 여파가 다른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우선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이승훈이 홍낙안 등의 고발에 따라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결과 이승훈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석방되었으며, 권일신은 제주도로 주25 정조의 권유로 옥중에서 주26 밝힌 회오문을 지어 바치고 감형받아 예산으로 귀양 가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또 이때 서울의 중인 출신 신자들에게도 박해의 여파가 미쳤다. 즉,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정인혁(鄭麟赫, 타대오), 손경윤(孫景允, 제르바시오) 등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배교하고 풀려났다. 경기도 광주 고을에서도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와 그의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또한 충청도 당진에서 배관겸(프란치스코)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산에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면천에서 김진후(金震厚, 비오),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 등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배교하고 풀려났다. 홍주에서 체포된 성화 집안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원시장(베드로)은 신앙을 증거하고 끝내 순교했다.

신해박해의 영향

신해박해는 다른 박해와 비교하여 그 규모는 작았지만, 조선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첫째, 신해박해를 계기로 조선 교회는 보유론적 천주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참 천주 신앙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양반 신자들 중에 천주교와 유교가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진산사건을 겪으면서 천주교와 유교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에 따라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게 되었다.

둘째, 신해박해를 겪으면서 중인층의 신자들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커졌다. 그 이전에는 양반 신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지도적인 역할도 거의 다 그들이 담당했으나 신해박해를 계기로 정부에서 천주교를 이단으로 금지함에 따라 양반 신자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고 중인 이하의 신자들이 그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셋째, 신해박해를 계기로 신자들의 내세 지향적인 신앙 태도가 강화되었다. 신해박해 이전에는 양반 신자들 가운데 천주교를 현실 사회 개혁의 방편으로 믿은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 그러한 양반 신자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면서 신자들의 신앙 태도는 내세 지향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넷째, 진산사건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신자들을 박해할 명분을 주었다. 즉,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과 권상연의 행동은 천주교를 반인륜적인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반대자들이 신자들을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다.

다섯째, 신해박해를 계기로 천주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다. 서양의 종교와 과학기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로 인식한 성리학자들은 진산사건을 계기로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까지도 배척함에 따라 조선의 과학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분도출판사, 1979, (샤를르 달레 원저))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논문

김수태, 「안동 권씨 부인의 유교식 조상제사 거부」(『교회사학』 13,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
서종태,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교회사연구』 1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임혜련, 「정조의 천주교 인식 배경과 진산사건의 정치적 함의」(『사총』 96,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9)
장유승, 「1791년 내포 : 박종악의 천주교 박해」(『한국 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조현범,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 논거에 대한 일고찰」(『종교연구』 78-1, 한국종교학회, 2018)
최기복, 「조상 제사 문제와 한국 천주교회」(『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사건의 성격」(『민족문화』 35, 한국고전번역원, 2010)
주석
주1

조선 중기에 실학사상을 주장한 사람. 우리말샘

주2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샘

주3

신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일. 영물이나 주물(呪物)을 종교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말샘

주4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 우리말샘

주5

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알려 드리다. 우리말샘

주6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하여 허베이(河北)에서 일어난 유적(流賊). 모두 머리에 누런 수건을 쓴 데서 유래하며, 태평도라는 종교를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말샘

주7

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키다. 우리말샘

주8

자기 나라나 민족, 통치자를 반역한 사람. 우리말샘

주9

어떤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우리말샘

주10

좋지 않은 일의 근본 원인이 되는 요소를 완전히 없애 버려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생길 수 없도록 하다.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말샘

주11

그릇되고 간사한 말. 또는 올바르지 않은 논설. 우리말샘

주12

사악한 것을 물리침. 우리말샘

주13

죄나 잘못을 따져 묻거나 심문함. 우리말샘

주14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5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아서 먹다. 우리말샘

주16

정성이 없이 겉으로만 번드르르하게 꾸밈. 또는 그런 예절. 우리말샘

주17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8

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다. 우리말샘

주19

올바른 학문. 우리말샘

주20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1

유학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2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다. 우리말샘

주23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다. 우리말샘

주24

엄중히 금하여 근절하다. 우리말샘

주25

죄인이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져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다. 우리말샘

주26

믿던 종교를 배반하다. 다른 종교로 바꾸거나 무종교인이 되는 일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7

조선 시대에, 양반과 평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층. 우리말샘

주28

인간관계나 질서에 어긋나는. 또는 그런 것. 우리말샘

주29

조선 정조 15년(1791) 신해년에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교 박해 사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그의 모상(母喪)을 가톨릭교 방식으로 행한 것에서 발단되어, 나라에서 가톨릭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여 가톨릭교 서적의 수입을 엄금하고, 교도인 윤지충ㆍ권상연 등을 사형에 처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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