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박해 ()

천주교
사건
1797년, 충청도 남부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박해.
사건/사건·사고
발생 시기
1797년
종결 시기
1800년
발생 원인
주문모 신부 추적과 충청도 지역 기근
발생 장소
충청도 남부 지역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주문모 신부, 정조, 이도기, 박취득, 원시보, 장산필, 배관겸, 이보현, 인언민, 방 프란치스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사박해는 정사년인 1797년(정조 21)에, 충청도 남부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박해이다. 1795년부터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1797년에 박해가 발생했다. 또 1790년대 충청도 지역 기근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린 것도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박해로 100여 명이 희생됐으나, 8명만 그 사적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매를 맞고 순교했다.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에 따라 관장들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강화한 탓이다. 그들은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었고, 그들의 확고한 믿음은 끝내 순교로 이어졌다.

정의
1797년, 충청도 남부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박해.
발단

충청남도 지역에는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 사이에 천주교가 전해졌다.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교로 입교한 후, 가족과 친척 및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내포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처음 형성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시기에 입교한 김종현(金淙鉉), 배관겸(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홍낙민(洪樂敏, 루가) 등의 전교로 솔뫼(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당진 진목(당진시 고대면 장항리), 면천 여름이(당진시 면천면 대치리), 청양 다락골(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등지에 천주교가 전해졌다. 이후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점차 다른 곳으로 전파되어, 내포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신자 수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

이렇게 내포교회가 성장해 가던 중 정사년인 1797년에 박해가 발생했다. 그 원인은 우선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 대한 추적과 관련이 있다. 1794년 말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를 1795년 5월에 체포하려다 놓치자, 정조는 자주 자신의 친위 조직 무관들에게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쫓게 했다. 그러나 종적이 묘연하여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자, 정조는 충청감사 김이영(金履永)과 주1 정충달(鄭忠達)에게 명하여 천주교에 물든 자들을 자세히 조사하여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따라 천주교도들을 정탐하는 과정에서 충청도 신자들의 실태가 드러나자 그들을 체포하여 교화시키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1796년에 김풍헌(金風憲, 토마스)이 청양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1797년에 이도기(바오로)와 박취득이 정산과 홍주에서 체포되면서 정사박해(丁巳迫害)가 발생했다.

또한 당시의 자연재해로 인한 주2도 1797년 정사박해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1791년, 1792년, 1794년, 1797년, 1798년에 걸쳐 계속 발생했다. 그 피해는 1798년 8월에 정조가 홍수와 가뭄으로 기근이 계속되는데도 백성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어 늘 한밤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서 새벽까지 주3을 서성였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기근은 충청도 지방도 겪어, 1796년 1월부터 4월까지 굶주린 백성들게 구호가 이루어졌으나, 1798년에는 호서지방의 가뭄이 가장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신자들은 가뭄과 기근의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렸고, 조정에서도 당시의 가뭄과 기근을 호서 지방의 번성한 천주교 탓으로 돌려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논의했다.

박해의 과정과 결과

기록상 가장 먼저 체포된 신자는 이도기였다. 그는 1797년 윤6월 8일에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11일 뒤인 1797년 윤6월 19일 한용화(韓用和)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공주에 부임한 뒤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일주일 늦게 면천군수로 임명된 박지원(朴趾源)도 부임 후 각 면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7년 8월 19일 면천 출신 박취득이 홍주 관아에 자수했다. 이어 1798년에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덕산 출신의 정산필(鄭山弼, 베드로), 홍주 응정리(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보(야고보), 면천 출신의 방 프란치스코, 당진 출신의 배관겸 등 여러 명의 신자가 연이어 체포되었다.

원시보는 덕산 포졸들에게 체포된 뒤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가 덕산으로 환송된 후, 감사의 특명으로 병사가 있는 청주로 압송되었고, 감사의 비장을 지낸 방 프란치스코는 홍주에서 체포되었으며, 배관겸은 1798년 10월 3일 면천 양제에서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몇 달 뒤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도기가 1798년 6월 12일 정산에서 매 맞아 순교했고, 12월 16일 방 프란치스코가 홍주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 이어 박취득이 1799년 2월 29일 홍주에서 목이 졸려 순교했고, 3월 13일과 12월 13일 원시보와 배관겸이 청주에서 매 맞아 순교했으며, 이틀 뒤인 12월 5일 덕산 출신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과 이보현(李寶鉉, 프란치스코)이 해미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 이로써 정사박해는 마무리되었는데, 1799년까지 100명 이상의 신자가 체포되어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8명의 순교자가 목숨을 바친 곳은 정산(1명) · 덕산(1명) · 홍주(2) · 청주(2) · 해미(2)였다. 이 중 관장이 진영장토포사를 겸하지 않은 정산과 덕산에서도 순교자가 나온 것은 관할 진영으로 이송하기 전에 해당 고을에서 1차로 심문하던 도중에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시보와 배관겸이 홍주에서 청주로 이송된 이유는 충청 병사 정충달이 신자들을 엄히 다스리라는 정조의 명을 받들어 이 시기 충청도의 박해를 주도하였고, 두 신자가 비중 있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8명의 순교자가 대체로 심문 중에 매질로 사망한 것은 형벌보다는 교화를 우선시하는 정조의 교화주의 입장에서 정사박해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심문관들의 목적은 정조의 교화주의 입장에 따라 신자들을 교화하여 천주교를 배반하게 만드는 데 있었는데,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8명의 순교자는 오랜 기간 온갖 고문과 매질을 당하면서도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에 고문과 매질의 강도가 갈수록 심해졌고, 대부분 심문 중에 매 맞아 순교하게 되었다. 이들 8명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양인 신분이었고, 주5비장과 같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신분층의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현재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다. 즉, 경제력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로,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던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천주교를 접한 그들은 변화에 대한 열망을 신앙을 위해 쏟아부었다.

이들은 전교 활동에도 힘을 써 충청도의 여러 지역으로 복음을 널리 전파했다. 또한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눔을 실천하여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즉, 박취득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헐벗고 곤궁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힘썼고, 이도기도 입교 후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자기 재산을 사용했다. 신자가 될 때 빈곤한 자들을 위해 자선에 힘쓰겠다고 맹세한 원시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전념했다. 아울러 그들은 풍부한 교리 지식을 토대로 천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 교리 지식을 체화하는 가운데 믿음이 확고해졌고, 이렇게 형성된 확고한 믿음이 순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8명의 순교자는 2014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 때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주6되어 주7에 올랐다. 이제 그들은 시성되어 성인품을 오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방상근, 『한국 천주교사연구의 성찰과 전망-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Charles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Librairie Victor palme, 1874))
이만채 편, 김시준 역, 『천주교전교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장유승, 『한국 천주교사연구의 성찰과 전망-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논문

방상근, 「18세기 말 내포 교회와 정사박해」 (『교회사학』 15, (재)천주교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이품의 무관 벼슬. 우리말샘

주2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 우리말샘

주3

왕의 자리 앞. 우리말샘

주4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중추부에 속한 종이품 벼슬. 우리말샘

주6

죽은 뒤 복자품(福者品)에 오르는 일. 또는 죽은 뒤에 복자품에 올리는 일. 우리말샘

주7

성인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교회가 인정하는 지위. 우리말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