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는 부모에게 경애의 감정에 토대를 두고 행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반용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효는 어디에서든 강조되는 덕목이지만 한국의 효는 유교적인 효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유교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가 모든 도덕 규범의 기초이다. 『효경』에서는 효를 ‘하늘의 불변한 기준이요 땅의 떳떳함이다’라고 하여 우주적 원리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효와 충이 충돌할 수도 있지만 ‘충신은 효자의 문에서 나온다’고 하여 효를 근본으로 하여 충을 조화시킨다. 더 나아가 부모의 사후에도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면서 효도를 다한다.
이러한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유교 고유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교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가 도덕 규범의 기초이고, 더 나아가 국가로부터 가족에 이르기까지 최우선의 가르침으로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에 그 독특성이 있다.
효란 본래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자녀가 지켜야 할 도덕을 의미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유교인들은 사후의 영원을 바라고 효를 종교화하여 자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개인은 하늘과 땅이라는 우주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우주적 자아이자 육체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가문적 자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세의 부모에 대한 효는 ‘생명(生命)의 근원’인 조상에 대한 공경과 보은의 출발점이자 전제가 된다.
제사는 초혼을 의미하며, 사후에도 현세에 돌아올 수 있다고 믿기에 조상에 대한 제사가 효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제사를 행하는 주체는 자손이기 때문에 자손, 특히 아들을 낳는 것이 효의 하나가 된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잘 지내고, 또한 아들을 낳아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 전체가 효라고 생각되었다.
효에 대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최초의 것으로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삼가 오전을 아름답게 하라(愼徽五典).”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오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주희(朱熹)의 해석에 따른 오상설(五常說)로서, 맹자(孟子)의 오륜을 가리킨다.
다른 설은 “아비는 친하고(父親), 어미는 자애롭고(母慈), 자식은 효도하고(子孝), 형은 우애하고(兄友), 아우는 공순하다(弟恭).”라는 것이다. 후자의 내용은 효(孝) · 제(弟) · 자(慈)라는 가족 윤리의 근간이 된다.
유교 사상의 핵심적 도덕 규범인 효의 원초적 · 본질적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공자(孔子)의 효에 대한 관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공자는 효의 본유 관념으로서 공경심을 강조하고 있다. 봉양하는 일뿐만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敬)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웃어른에 대한 예절로는 얼굴빛, 즉 존경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하였다.
둘째,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효경』에서 “우리의 신체는 머리털에서 살갗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비롯이니라.”라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셋째, 효는 공자로부터 이미 사후에까지 확대된 개념으로 드러난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로써 섬기고, 장례도 예로써 치르고, 제사도 예로써 모시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교의 상 · 제례가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하여 효 사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맹자는 선진시대(先秦時代) 효 관념의 정립자라 할 만큼, 공자의 효 사상을 유교의 중심 사상으로 굳게 다져 놓았다. 그는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 · 순의 도리도 효제(孝悌)일 따름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효를 제왕의 도로 확대하였다.
“효자의 지극함은 어버이를 높이는 일보다 더함은 없을 것이다. 어버이를 높이는 일의 지극함은 천하를 가지고 봉양해 드림보다 더함은 없을 것이다. 천자의 아비가 되니 높음의 지극함이요 천하로써 봉양하니 봉양의 지극함이니라.” 위의 구절에서 맹자는 제왕의 대효(大孝)를 말함과 동시에 입신양명을 효의 중요 요소로 부각시켰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秦)과 그 뒤 한대(漢代)를 거치면서, 사회적 · 정치적 변화에 따른 사상적 변화 속에서 효 사상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것은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는 삼강 사상의 성립이다.
여기서 강이란 ‘모든 그물의 벼리’를 뜻하는 것이다. 즉, 임금[君] · 부모[父] · 지아비[夫]는 벼리가 되고, 신하[臣] · 자녀[子] · 지어미[婦]는 그물코가 되어 일방적인 군림 관계가 된다. 이에 따라 충 · 효 · 열도 권위에 바탕한 종속 윤리로 귀착된다. 따라서 강 사상이 선진의 윤리 개념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고대의 효 사상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효경』의 저작이다. 증자(曾子)의 저작이라고 믿어져 왔으나 실제 작자는 불분명하다. 저작 시기는 대체로 전국시대 말기로 추정된다. 『효경』은 봉건제도에 입각하고 있으며, 공맹의 효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내용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효의 대상이 군주와 상관까지 확대되어 있으며, 아비의 절대적 권위는 상대화되고 종족의 폐쇄성은 약화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효도를 천지간에 으뜸인 지덕요도(至德要道)로 삼고, 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치 지배의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효경』에서의 효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선 효를 덕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효의 방법으로는 직접적이면서 기본적인 사친(事親)과, 간접적이면서 종국적인 입신행도(立身行道)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윤리 도덕인 효를 “하늘의 불변한 기준이요 땅의 떳떳함이다(天之經 地之義).”라고 하여 우주적 원리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는 정치적 교화의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효 사상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또 다른 중요한 윤리인 ‘충’과 상호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개념의 함의 안에 이미 모순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효란 자신의 신체를 잘 보존하고 부모를 잘 봉양하며 종족을 보존해야 한다는 가족 사회를 바탕으로 한 윤리이다.
이에 대해, 충이란 때로 국가나 군주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는 국가적 차원의 윤리이다. 따라서 마찰은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충신이 효자의 문에서 나온다.”고 하여 효를 근본으로 하여 조화시켜 왔다.
이러한 효 사상이 한국에서 전개된 과정을 살펴보면, 교육 기관을 통해 충의 사상과 아울러 고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고구려에서 최초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소수림왕 2년(372) 중앙에 설치된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는 오경과 중국의 사서들을 상류 계급의 자제들에게 교육하였다.
백제의 경우 교육 기관을 통해 유학 교육을 실시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지』 변진전(弁辰傳)이나 당나라 때 편찬된 『주서(周書)』 백제조 등의 기록을 통해, 백제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했고 경학(經學)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 가운데에서 가장 늦게 유학이 들어왔다. 지증왕(437∼514) 때에 ‘왕’이라는 호칭과 상복제(喪服制)를 사용했고, 유학 교육기관인 국학에서는 『논어』와 『효경』 등이 필수 과목이어서 충효 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인 세속오계의 도덕 규범을 교육받은 화랑 가운데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김유신(金庾信) · 사다함(斯多含) · 관창(官昌) · 원술(元述) 등이 그들이다. 또한, 화랑 출신 이외에 박제상(朴堤上) · 김반굴(金盤屈) 등의 충신과, 『삼국사기』에서 효의 표본으로 기록된 향덕(向德), 효녀 지은(知恩), 설씨녀(薛氏女) 등이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고려시대 역시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상 · 중 · 하 3품에 걸쳐 『논어』 ·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였다. 이를 볼 때 유교적 충효 사상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효선편(孝善篇)에 실려 있는 효행에 관한 네 개의 미담은 인과응보의 불교적 사고가 배어 있고, 부처의 가호로 행복하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공통점이 있다. 고유의 효 사상에 불교 문화가 가미된 새로운 효 관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불교에서도 효는 중요한 덕목으로서 『효자보은경(孝子報恩經)』 · 『효자담경(孝子睒經)』 등의 책이 간행되었다. 유 · 불 · 선 삼교에 능통한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에서 화랑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충성하라는 것은 공자의 말씀이다. 의식적으로 함이 없는(無爲) 일에 처하고, 말이 없는(不言) 가운데 가르침을 행하라는 것은 노자의 주장이다. 어떠한 죄라도 범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힘써 행하라는 것은 석가여래의 교지이다.”
고려 말에 편찬되었다고 전해지는 『명심보감』은 유학적 효 사상을 여러 중국 고전(효경 · 논어 · 맹자 등)에서 골라 엮은 명언집이다. 최초로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수신서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효 관념은 『효경』 · 『논어』 등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도였다. 효 관념이 정치적 · 사회적 규범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조선조 주자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 속에서 가능하였다.
고려 왕조를 대신한 조선 사회는 백성을 교도하는 새로운 도덕적 규범과 준칙을 채용하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조선 사회는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에 힘쓰게 된 것이다. 주자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 왕조는 충효 사상을 국민에게 널리 보급하고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세종 13년(1431)에는 설순(偰循) 등이 편찬한 『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다. 이것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충신 · 효자 · 열녀 각 35인의 행적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중종 13년(1518)에는 조신(曺伸)이 편찬한 『이륜행실도』, 광해군 때는 유근(柳根) 등이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정조 때에는 앞에 나온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개편한 『오륜행실도』 등이 발간, 반포되었다.
이들 행실도는 모두 효자 · 충신 · 열녀의 순으로 되어 있어, 효가 정치적 · 사회적 질서의 근본 규범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형화된 오륜 사상에는 부자유친이 군신 · 부부 · 장유 · 붕우의 인간 관계에 앞서 있다. 즉, 삼강의 군신 · 부자 · 부부 관계를 발전시켜, 맹자에 이르러 실천 도덕으로 완성된 오륜 사상을 받아들이고, 효를 오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렇듯 보편적인 성격을 띤 효 관념은 고려 말에 주자학이 수용되고, 조선시대에 성리학 사상이 체계화되면서 철학적 · 이론적인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성리학에서는 보편적인 이(理)가 인간에게 내재하여 성(性)이 되고, 인간 사회의 도덕 규범으로서의 오륜적 질서는 인간에게 내재된 성의 현현(顯現)으로 이해된다.
이황(李滉)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자(慈)이고, 자녀가 부모를 잘 받드는 것이 효이다. 효자의 도리는 천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선의 으뜸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효자라는 도덕 규범의 보편적 · 기본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주희의 말을 인용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에 인하여 그로써 하늘을 받드는 도리를 밝힌다.”라고 하였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질서의 근원은 효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육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만물의 부모인 하늘을 섬기는 것과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이(李珥)의 효 사상은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입지(立志) · 지신(持身) · 효행 · 제례 · 지인(持人) 등을 가르치기 위한 수신서이다. 그는 첫머리에서 오륜을 풀어 부자(父慈) · 자효(子孝) · 신충(臣忠) · 부부별(夫婦別) · 형제우(兄弟友) · 붕우신(朋友信)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이의 시대에 이르면 수신과 효행에 구체적 조건이 따르고, 아비의 자애보다는 자식의 효도에 중점이 두어진다. 그리하여 공순(恭順) · 수종(隨從) · 부양(扶養) · 안락(安樂) · 제사(祭祀, 遺志繼承) 등이 효의 5대 원리라 할 만큼 강조되었다.
부자(父慈)의 도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이황에서 이이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정통 도학에 있어서는 효 관념이 성리학의 우주론이나 인간론의 이해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 보편적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 19세기에 이르면서 점차 정통 성리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일어나면서 효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익(李瀷)의 경우를 보면, 『성호사설』 권3에 충효를 말하면서 충이 앞서고 효가 뒤를 따르며, 충에 이르려면 효가 있어야 하고, 효가 아니면 곧 불충(不忠)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효보다 충을 우선하는 태도이다.
성리학에 비판적이었던 소수의 실학자들은 치인양성(治人養性)에 주목적을 두었던 성리학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과거제 폐지와 양반의 취업 등을 주장하였다. 즉, 국가 의식을 가족 의식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효가 이루어지면 다른 덕목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조선 초기의 사상에 반기를 든 셈이다.
이는 임진왜란 · 병자호란 등의 국난을 겪은 새 시대에 일어난 충효 사상의 변화라고 할 것이다. 이른바 ‘서양과의 만남’, 그리고 근대화의 물결과 접하면서 실학자들은 상공업 진흥을 위해 양반도 노동해야 하며 과학을 배우고 서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풍조가 일어나자 윤리관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예로서, 동학의 효 관념을 보면, 「팔리훈강령(八理訓綱領)」에서 효행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대효(大孝)란 지효(至孝)를 말함이다. 한 사람이 능히 한 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또 능히 천하의 사람들을 느끼도록 하나니, 천하의 지성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리오. 사람이 느끼면 하늘도 또한 느끼느니라.” 이처럼 효의 어려움을 말하고, 효행의 실천을 안애(安哀) · 쇄애(鎖愛) · 순지(順志) · 양체(養體) · 양구(養口) · 신명(迅命) · 망형(忘形) 등으로 가르쳤다.
천도교의 효 사상은 유교와 달리 충과 연결시키지 않고 천의(天意)와 연결시킨 특징이 있다. 실천 윤리는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효가 어려운 이유를 천의에 맞게 지신하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개화 사상이 일어나면서 윤리적 가치는 분화되어 나타난다. 19세기에 이르면 가족 윤리와 국가 윤리, 그리고 · 사회 윤리를 따로 생각하게 된다. 즉, 효 · 충 · 신을 덕목으로 하되 그 대상을 부모-자식, 임금-신하, 이웃-이웃의 인간 관계로 설명하게 된다.
효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으뜸가는 덕목으로 국한된다. 다시 말하면, 충 · 효 · 신의 기능이 나누어지고, 각 덕목이 독립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효 사상은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시대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전통 사회에서 효 윤리는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반면 효도 예절이 형식적으로 고정화 · 관습화되어 개인의 진취적 기상을 억압하고 사회의 합리적 개혁을 둔화시켰던 부정적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효의 본질을 재인식하고 그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