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유교 경전이다. 공자의 인(仁)에 의(義)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하였다. 사람의 천성은 착하며, 이 본성을 지키고 가다듬는 것이 도덕적 책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후한의 조기는 『맹자』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7편을 14편으로 만들었다. 송나라 주희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맹자집주』를 지었다. 육경보다 사서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맹자』는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맹자는 공자 사상을 옹호하고, 이를 진전시켰기에 공자 다음가는 아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서(四書: 논어 · 맹자 · 대학 · 중용) 중의 하나이다. 양혜왕(梁惠王) · 공손추(公孫丑) · 등문공(滕文公) · 이루(離婁) · 만장(萬章) · 고자(告子) · 진심(盡心)의 7편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맹자의 저술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저작물에 ‘맹자’라고 한 점 등을 들어 맹자의 자작(自作)이 아님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맹자가 죽은 뒤 그의 문인들이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어쨌든 수미일관(首尾一貫)한 논조와 설득력 있는 논리의 전개, 박력 있는 문장은 맹자라는 한 인물의 경륜과 인품을 전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보완 · 확장하였다. 공자의 인(仁)에 의(義)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했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말했으며, 민의에 의한 정치적 혁명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는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가 깔려 있다. 사람의 천성은 선하며, 이 착한 본성을 지키고 가다듬는 것이 도덕적 책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후한의 조기(趙岐)는 『맹자』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 작업을 통해 7편을 상하로 나누어 14편으로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 체재가 보편화되어 있다. 송대에 이르러 주희(朱熹)는 조기가 훈고(訓詁)에 치중해 맹자의 깊은 뜻을 놓쳤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의 관점에서 『맹자집주(孟子集註)』를 지었다. 이 책은 조기의 고주(古註)에 대해 신주(新註)라고 한다. 주자학이 관학(官學)으로 채택된 원대 이래 공식적인 해석서로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 유학의 전래와 함께 『맹자』도 같이 유포되었지만, 고려 말까지는 육경 중심과 사장학적(詞章學的) 경향에 밀려 『논어』나 『문선(文選)』 등의 다른 경전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었다. 문장보다 인격을, 육경보다 사서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주자학이 도입되어 자리를 굳히면서 『맹자』는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서로 부상되었고, 주희의 주석서가 해석의 정통적 기준이 되었다.
맹자사상의 일관된 핵심은 성선설과 혁명론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이 활발한 논란을 거쳐 배타적 권위를 형성하는 17세기 말까지 성선설에만 국한되었다.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으로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조선조 후반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는 입론(立論)의 근거를 주희의 주석에서만 구함으로써 200여 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다.
주희의 경전 해석과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맹자질서(孟子疾書)』에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고 한 것은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의 조화를 꾀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자학의 비현실적인 명분론과 의리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맹자는 백가(百家)가 다투어 각기 다른 사상을 주장하던 전국시대에 의연하게 공자사상을 옹호하고, 이를 한층 진전시켰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맹자』 전편에 흐르고 있어서, 공자 다음가는 아성(亞聖)으로 추앙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