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李瀷: 1681~1763)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한 재야학자이다. 이익은 주희의 경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퇴계 이황의 예설과 형이상학에도 주목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과감한 비판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학문정신은 많은 후학들에게 계승되었으며, 특히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져 한층 발전된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이익은 19세기말까지 조선 후기의 사상계를 풍미하게 되는 실학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인물로 주1
이익은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주요 경학 저술인 『질서(疾書)』는 실학파 경학의 기틀을 연 저술로 평가된다. 이는 곧 조선 지식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의 역사’가 시작되는 효시로 간주되기도 주2 『질서』에 대한 높은 평가에 힘입어 이익의 경학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익의 질서류 저작은 대체로 청년기에서 중년기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생애 전반에 걸쳐 작성되었으며, 그 가운데 「경사문(經史門)」은 질서류 저작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질서』에 포함되지 못한 내용이 『사설』에 포함되기도 하였기에, 양자를 함께 비교 ·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제경질서(諸經疾書)’는 이익의 전체 저작 가운데 1/4의 분량에 해당하는 경전 주석서로서 그의 또 다른 유설류 저작인 『성호사설』과 함께 이익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맹자질서』는 이익의 질서류 저작 가운데 가장 먼저 집필된 것으로, 약 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집필 당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맹휴(孟休)’라 지었을 정도로 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이익은 『맹자』가 사서 중 가장 늦게 성립된 경전으로서, 시대적으로 가깝고 내용이 상세하다는 점에서 경의(經義)를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는 성인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이 같은 신념이 『맹자질서』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질서’라는 명칭은 주희가 장재의 초상에 덧붙인 「횡거화상찬(橫渠畵像贊)」의 ‘묘오질서(妙悟疾書)’에서 차용된 것으로, 이는 생각이 떠오르면 곧장 써두어 잊지 않으려는 의미와 더불어, 충분한 사색 없이 기록했다는 겸양의 뜻도 함께 담고 있다.
『맹자질서』는 주희 이래로 확립된 『맹자』 해석의 체계를 존중하면서도, 명대의 『영락대전』 편찬 이후 훼손된 본뜻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집필되었다. 이익은 주희의 견해를 따르되, 경전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주희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지 단순히 그 ‘의견’을 반복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는 회의(懷疑)와 자득(自得)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문헌학적, 역사학적 해석에서도 그는 경문의 문자를 철저히 분석하고 문세(文勢)와 어세(語勢)에 입각한 해석을 시도했으며, 고증과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경전의 본의를 복원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이익의 경학은 시대 현실과의 접목을 지향하였다. 그는 경전 해석에서 ‘이익과 정의의 관계’, ‘정전제’, ‘십분의 일세(十分之一稅)’ 문제, ‘왕도와 패도’의 구분 등에서 백성의 현실과 사회의 시의(時宜)를 반영하려는 실용적 · 실천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이익은 『맹자질서』에서 문세와 어세를 중시한 해석을 통해 경전의 본의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이황의 경전 해석의 방향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엄정한 해석 태도, 치밀한 분석,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해석은 어떠한 권위에도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인 학문 태도를 보여 준다. 이익의 이러한 해석학적 전통은 정약용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약용이 보여 주는 자기 견해에 대한 자신감, 개방성, 포용성은 이익의 경전 해석과 깊은 친연성을 지닌다. 이처럼 『맹자질서』는 단순한 경전 주석서를 넘어, 조선 후기 실학 경학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저술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