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에 따르면 조익은 1649년 3월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세자좌빈객을 겸하게 되자 『맹자천설(孟子淺說)』과 『중용곤득(中庸困得)』을 조정에 주1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맹자천설』이 보존되어 있으나, 그중 가운데 권에 해당하는 권6~10의 내용이 빠져 있다. 처음에는 분명 상·중·하 3책본이었을 것인데 어느 순간 2책으로 결책된 상태로 전해진 것이다.
서목류에 최초로 등장하는 『서서서목첨록(西序書目籤錄)』[1792년 편성]에 수록될 때부터 이 책은 이미 2책이었다. 중권(中卷)을 잃어버린 2책본 『맹자천설』은 약방의 감초처럼 꾸준히 전해져 20세기 이후에 제국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을 받고 현재까지 이어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도서에도 『맹자천설』이 전한다.
『맹자천설』은 천설류 저작의 하나로, 『맹자(孟子)』 전편에 대한 주석 외에도 조익이 이전에 분류 천설을 시도한 적이 있어 그 목차가 전해지고 있다. 조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폐해진 민생을 되살려야 하는 국가 재건의 시기에 공정하고 현실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재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인재 양성은 학문에 있다고 여겨 경전의 충실한 학습을 강조하였다. 학문에는 이치를 궁구하기 위한 독서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성의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은 ‘ 경(敬)’을 통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수양의 방법이기도 한 ‘경’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자신의 학문을 정치적 상황에 충실하게 접목시키는 내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조익은 ‘이치는 천하의 공물’이라는 관점으로 경전을 좀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경전의 해석이 궁극적으로 경전의 본의를 알려는 것이지 선현을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본지에 대한 추구와 경전 해석의 정신을 배우려는 자세는, 『맹자』에서 왕도 정치와 애민 의식을 깨닫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기미(幾微)의 사이에서 분석하고, 의리(義利)의 사이에서 국가 존망의 이치를 결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익은 『맹자』가 다른 경전보다 더욱 우위적 지위를 누려야 하는 이유를 “성인의 도를 구해 보려면, 반드시 맹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는 한유(韓愈)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통(道統)의 관점을 준수하였다. 또한 도통의 논의를 발전시켜 정자와 주자도 맹자를 통해 성인의 경지를 지향하여 그동안 단절되었던 계통을 잇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조익은 『사서대전(四書大典)』과 언해본의 기초 위에서 마련된 경서 이해를 바탕으로 『맹자』 전편에 대해 글자의 훈고나, 구결의 정확한 이해를 넘어서 경전의 의미를 깊이 추구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의 경전 해석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들어 처음으로 『맹자』 전편에 대한 주석을 가하였으니, 이는 조선시대 『맹자』 주석사에서 매우 의미있고 획기적인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단순히 경전을 자신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맹자』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쟁점을 10가지의 주제, 즉 성(性), 학(學), 심술(心術), 인륜, 처신, 처세, 치도(治道), 왕패(王霸), 벽이단(闢異端), 도통(道統)으로 분류, 해석하려 했다는 것은 날카로운 시각적 접근으로 이해된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주자의 주석에 대한 보완적 해석이라는 한계점이 있긴 하지만, 전편에 대한 주석을, 적어도 경전의 이해에 급급한 방식이 아닌 ‘지공무사(至公無私)’와 ‘변통(變通)’의 시각으로 일관되게 적용시킨 것은 중요한 학문적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맹자학사에서 『맹자』 전편에 대한 일관된 관점의 반영은 이후에도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 등 탁월한 실학파 학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귀중한 것이다.
조익이 『맹자천설』에서 보여 준 유연하고 시의(時宜)에 부합하려는 개혁적인 태도와 주자의 해석에 함몰되지 않고 경전의 본의를 끝까지 추구하려 한 점은 이후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주자의 경전 해석에 매몰되어 주자학 교조주의로 흐르는 것에 견주어 볼 때, 경전 탐구의 학술적인 건강함을 잃지 않았던 면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후 정조와 같은 개혁 군주가 대전에서 주석을 제외하고 사서와 삼경의 본문만을 하나로 묶어 『사서삼경정문(四書三經正文)』을 편찬하면서 경전의 본의를 추구한 바 있는데, 조익은 이미 그 이전에 그러한 본지 탐구의 정신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조익은 성학을 실현할 수 있다는 지치주의 이념을, 좌의정까지 오른 경륜을 바탕으로 실제 정치에 구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생각을 담은 경전의 주석을 국왕에게 적극적으로 바침으로써 이론적 탐구를 최대한 현실화시키려 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