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사상은 최고 통치자인 왕이 성왕(聖王)의 덕을 갖추어 공정한 경제정책으로 민중의 삶을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정치사상이다. 이 사상은 『서경』에 그 개념적 전거가 나타나며 맹자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상적 통치 사상으로, 유학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시경』, 『서경』, 『주역』, 『논어』, 『맹자』, 『순자』 등 여러 유가 경전에도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왕도 정치는 그 핵심 전제가 덕(德)에 의한 정치이며, 실제 시행에 있어서는 경제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맹자는 왕도 정치의 시작이 정전제와 같은 경제 제도를 통해 각자의 몫을 공정하게 나누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왕도 정치사상은 패도 정치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만큼, 패도 사상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맹자가 왕도와 패도를 대립적으로 파악하였다면, 순자는 두 사상 사이의 상보적 역할을 해명하였다. 그는 왕도와 패도를 각각 덕을 기준으로 하느냐, 신(信)을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고 보고, 이상적 왕도가 실행되지 못할 경우에는 패도 또한 일정 부분 시행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중국에서는 왕도 사상이 한당(漢唐) 대를 거쳐 송대에 이르러 도통론을 통해 계승되었다. 주희는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강조하며, 절동(浙東) 사공학파의 공리주의적 왕패 병행론을 비판하였다. 왕도 사상은 조선시대에도 건국과 국가 운영의 기초가 되는 정치사상이었는데, 조선 초기 정도전이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것을 비롯해, 조광조의 지치주의, 이황과 이이의 성학 사상, 영조와 정조의 탕평론 등도 모두 왕도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왕도(王道)’라는 용어는 『서경』 「홍범(洪範)」 편의 “치우침이 없고 공정하면 왕도가 광대하고,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며, 뒤집힘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하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왕도는 곧 공평무사하여 치우침이나 기욺이 없는 중용(中庸)의 정치를 뜻한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덕치주의와 정명론(正名論)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덕치주의가 힘이나 강제에 의한 통치보다는 덕에 의한 자발적 감화를 중시한 것이라면, 정명론은 그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맹자에 의해 인정(仁政)으로 계승되어 왕도 정치사상의 핵심 정신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서경』의 사상은 심성론적 근거로서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惻隱之心]’을 정치에 적용한 맹자의 왕도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맹자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민생의 안정, 즉 경제적 기반의 확립을 선결 과제로 보았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는 그의 발언은, 백성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토지 제도의 정비, 침략 전쟁과 부역으로 농사의 시간을 빼앗지 말 것, 무지에서 비롯된 죄는 가볍게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효제(孝悌)의 교화를 통해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할 때, 비로소 왕도 정치의 핵심 조건이 충족된다고 보았다.
순자 또한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지만, 패도 정치 역시 일정한 정치 현실에서는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탕왕은 박(亳) 땅에서, 무왕은 호(鄗) 땅에서 천하를 다스렸는데 모두 사방 백 리의 작은 땅이었다. 그러나 천하는 하나가 되고 제후들은 신하가 되었으며 만방이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의리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의리를 세워 왕도를 행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순자는 이처럼 ‘의리[義]’를 왕도 정치의 근본 표준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도를 통치의 유일한 방식으로 보지 않고, 패도를 왕도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이해하였다. 순자에게 있어 패자는 비록 덕(德)과 의(義)를 온전히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벌 규정과 정령의 공포, 맹약을 통해 동맹국을 속이지 않음으로써 강성한 군대와 통일된 나라를 유지하고, 말과 행동이 사실과 일치하도록 하여 신뢰[信]를 지키는 것을 핵심 원리로 삼는 통치자였다.
남송대에 이르러 주희(朱熹)와 진량(陳亮)은 왕도와 패도의 기준과 그 사례를 두고 논쟁하였다. 이들의 주요 논의 대상은 한고조(漢高祖)와 당태종(唐太宗)이 왕도를 행하였는가, 아니면 패도를 행하였는가를 판단하는 문제였다. 주희는 이들을 패도를 행한 황제라고 본 반면, 진량은 왕도를 행한 것으로 보았다. 진량은 한고조와 당태종의 본령(本領)이 곧 유자(儒者)들이 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고조와 당태종은 본래 천리(天理)를 얻었기 때문에 능히 국가를 세워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으며, 곧 옳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한고조의 경우 사사로운 의도의 분수가 아주 뜨겁지는 않았지만, 이미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태종은 일념(一念)이라도 인욕(人欲)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인의(仁義)를 빌려 그 사사로움을 행한 것이다. 당시 함께 다투었던 자들은 재능과 지술이 이미 그보다 못하였고, 또 인의를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뿐이다. 당태종은 이들보다는 뛰어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능히 국가를 세우고 자손에게 오래도록 전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곧바로 ‘천리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성패(成敗)로써 시비를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희는 이처럼 한고조와 당태종의 성공이란 동기에서 도덕적 본령을 지니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며, 그것을 곧바로 옳음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유학의 왕도 사상은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다양한 정치적 정책 방법론으로 작용하였다. 고려의 최승로는 「시무28조」 가운데 제14조에서 “순수하고 전일한 군주의 덕과 사심이 없는 마음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고 지치(至治)를 실현하는 근거가 된다”고 하여, 덕에 의한 정치로서 왕도 정치의 이상을 핵심적인 시무책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은 “교육과 과거제를 강화하여 유교 교육을 통한 도덕적 각성과 교화를 확대하고, 공론(公論) 정치를 활성화하며, 경연(經筵)을 통하여 국왕과 문신 관료들이 경학과 시무(時務)를 함께 토론하면서 국왕을 올바른 정치로 인도하여 왕도 정치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방안을 내세웠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서적포를 설치하고 유교 서적을 간행하며, 유학 지식층의 확대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이와 같은 유학의 왕도 정치 이상을 재상 중심론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군주가 덕을 쌓는 과정을 통해 치인(治人)의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조선조 유학자들의 이상이었다.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군주의 수덕(修德)의 터전을 확립하기 위한 저술이었다. 반면, 이황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 「동호문답(東湖問答)」 등은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글들이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론 또한 유학의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정책 방안이었다. 『서경』 「홍범」 편에서 왕도를 말하면서 ‘왕도탕탕(王道蕩蕩), 왕도평평(王道平平)’이라 하여, 왕도를 실현하는 핵심 원리를 ‘탕평(蕩平)’으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유학의 왕도 사상은 선진 시대 이후 유학의 핵심 정치사상으로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전승되었고, 조선에 전래되어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통치의 중요한 이념적 기반이자 정책적 수단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