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집단인 국가 사회나 더 나아가 인류 사회에서 민생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면서,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서는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력에 의한 평화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사상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 강한 관심을 가져 왔으며, 이런 관심은 자연히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과 노력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이로 인해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비판 및 이상 정치의 방안 등이 유학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공자가 제시한 덕치나 맹자가 제시한 왕도정치 사상은 이런 관심의 발현이다.
유학 사상에서 정치 사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본래 유학 사상이 ‘이상적인 정치(至治)’를 실현한 옛 성왕(聖王)의 도(道)를 계승하는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도사상은 비록 맹자에 의해 유교 정치 철학으로 정립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요·순(堯舜) 이래 하(夏)·은(殷)·주(周) 3대의 지치(至治)를 계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천명정치(天命政治)를 제시한 ≪서경≫의 사상과 덕치주의를 제시한 공자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형성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왕도’라는 말은 ≪서경≫ 홍범편(洪範篇)의 “치우침이 없고 공정하면 왕도가 광대하고,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며, 뒤집힘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왕도란 곧, 공평무사한 중용의 정치를 의미한다.
이 ≪서경≫의 사상은 지공무사의 천명을 인간이 대신해 구현한다는 천명정치 사상으로 이어져 맹자의 왕도사상으로 계승된다.
한편, 공자의 정치 사상은 덕치주의와 정명론(正名論)으로 집약될 수 있다. 덕치주의가 통치 방법에 있어 힘이나 강제에 의한 통치보다는 덕에 의한 자발적 감화를 중시한 것이라면, 정명론은 그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맹자에 의해 인정(仁政)으로 이어져 왕도정치 사상의 핵심적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유학을 수기(修己)·치인(治人)의 사상이라고 볼 때, 왕도 사상은 치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수기와 치인은 상호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치인보다는 오히려 수기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왕도정치 실현의 근거를 인간의 내면적 성선(性善)에서 찾는다.
이것은 공자의 덕치주의의 계승이며 심화라 할 수 있다. 죽으러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 제선왕(齊宣王)의 마음에서 왕도정치 실현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맹자의 말이 바로 그 단적인 예다.
맹자는 군주의 이런 어진 마음이 구체적인 정치 현실로 표현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을 통한 민생의 확립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항산(恒産)을 갖지 못하고서는 항심(恒心)을 갖기 어렵다는 맹자의 말은, 민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고 거꾸로 생활의 안정을 방해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통치자에 대한 경고이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첫째는 정전법(井田法)을 통한 토지 제도의 정비였다. “인정은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말로써 그는 정전법으로 자립적인 민생 안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지적했다.
둘째는 무의미한 침략 전쟁과 부역으로 백성이 농사를 지을 시간을 빼앗지 말 것과, 10분의 1의 가벼운 세금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 의해 저질러진 죄는 가볍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백성은 부모 처자를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송하는 데 유감이 없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생의 안정은 왕도정치 실현의 터전일 뿐 완성은 아니다. 이 터전 위에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중요한 여건이 된다. 인간다운 삶을 배제한 단순한 경제적 안정과 풍요는 때로 비인간적인 삶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효제(孝悌)로 대표되는 인간다운 삶의 이상이 제시되고, 그의 실현을 위한 교육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의 정치를 교화라고 하는 소이다. 우리 나라에서 중앙에 성균관과 지방에 향교·서원을 설치하고 ≪가례≫·≪소학≫·≪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 등을 간행, 반포한 것도 모두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실로 민생의 안정을 통해 삶의 터전을 정초시키고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천 방법이라 하겠다.
한국 유학사의 흐름 속에서 왕도사상은 초기에는 공자의 덕치주의로 받아들여지는데, 대표적인 예가 고려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다. 이것은 많은 부분 실제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기본적인 정신은 덕치주의와 왕도사상에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제14조의 “순수하고 전일한 군주의 덕과 사심이 없는 마음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고 지치를 실현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은 그대로 유학 정치 사상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흐름은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조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백성의 아픔을 잘 살펴 갖가지 시책으로 그것을 치유한 세종의 업적이나, 군주의 정심(正心)을 터전으로 삼대(三代)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 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는 모두 이 왕도사상의 한국적 구현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군주의 수덕(修德)을 통해 치인의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조선조 유학자의 이상이었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나 이이(李珥)의 ≪성학집요 聖學輯要≫가 군주의 수덕의 터전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황의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나 이이의 <만언봉사 萬言封事>와 <동호문답 東湖問答> 등은 왕도정치 실현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황은 <무진육조소>에서 “위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펴, 덕을 닦고 정치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 안민장(安民章)에서 애민(愛民)·외민(畏民)의 방도와 절용생재(節用生財)와 제민항산(制民恒産) 등을 통한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현을 역설하였다.
군주의 수덕, 더 나아가 인간의 순수한 심성 자체에서 왕도정치 실현의 가능 근거를 찾는 유학의 정치 사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절대적 전제권과 술수를 위주로 하는 법가적 통치술을 견제하고 바른 정치를 지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