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1501~1570)의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 퇴도(退陶) · 도수(陶叟)이다. 명종‧선조 대의 문신이자 저명한 주자학자로, 조선 주자학의 근간을 이룬 퇴계학파의 종장이다. 관직으로는 대사성, 영주군수, 풍기군수,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등의 저작을 통해 원대 주자학의 조선 수용과 정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서원 및 향약 운동을 주도하여 관학을 넘어 민간의 향촌 사회에 학술과 도덕 기풍이 정착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도산서원으로 확장되는 도산서당을 창건하여 제자들을 강학하며,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석의(釋義)’ 작업을 통해 주자학적 관점에서 경전 해석의 통일을 꾀하였다. 이 작업은 이후 선조의 명으로 본격적인 경서 언해 작업에 착수한 유희춘에게 중요한 해석적 기반이 되었다.
『사서석의(四書釋義)』는 퇴계 생전의 강학용 수고(手稿)로, 사서삼경에 대한 해석서이다. 생전에 정고본이 완성되었으나 임진왜란 중 망실되었고, 1609년 경상감사 최관(崔瓘)의 지원과 제자 금응훈(琴應壎)의 노력으로 생전 제자들의 전사본을 집성하는 방식으로 다시 편찬되었다. 현재 전하는 목판본은 『대학석의』, 『중용석의』, 『논어석의』, 『맹자석의』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석의』와 『중용석의』는 장 구분 없이 서술되어 있고, 『논어석의』와 『맹자석의』는 각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근래에는 영주 소수박물관에 소장된 『퇴계용학석의변오(退溪庸學釋義辨吳)』 필사본과 경북대학교에 소장된 『퇴계사서석의(退溪四書釋義)』 필사본이 1609년 목판본과 일부 내용이 상이함이 확인되어 편찬 과정에서의 수정 여부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사서석의』는 자의와 문장의 정확한 해석에 집중한 책으로, 어조사 하나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말로 현토를 조정하고, 번역이 어려운 부분은 한문 독해로 의미를 보충하며, 한국어의 미세한 어감 차이도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이는 단순한 번역을 넘어 주자의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퇴계 특유의 독법과 인간 이해를 담은 경전 독해였다. 철리(哲理)적 논변이나 방대한 문헌 인용은 적지만, 당시로서는 최전선의 학문적 시도였다.
『대학석의』 · 『중용석의』에서는 자의 해석에 근거하여 도학적 인간상과 수양의 방향을 제시하며, 깊은 독해와 뚜렷한 인간학적 지향이 돋보인다. 『논어석의』는 제자들과의 문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자 실명이 명기된 경우도 있다. 이는 실제 강학의 맥락을 드러내며, 언해 해석의 교육적 실용성을 보여 준다. 『맹자석의』는 맹자의 정치사상을 단순한 이상이 아닌 구체적 현실을 반영한 주장으로 파악한다. 군주와 백성을 각각 독립된 도덕 주체로 상정하고, 주체적 의지를 강조한 점도 퇴계 해석의 특색이다.
한편, 퇴계의 제자인 이덕홍은 『사서질의(四書質疑)』를 통해 『석의』에 대한 의문을 제출하였고, 일부 내용은 퇴계 견해와 중첩되기도 한다. 이로 보아 『석의』와 『질의』 사이에는 상호 작용과 해석의 논의 과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본격적인 경전 주석서는 아니지만, 후학을 위한 번역 중심의 강학용 수고로서, 조선 경학사에서 중요한 경학적 문제의식의 맹아를 보여 준다. 제자들에 의해 집성‧편정된 이 전사본은 다양한 해석을 하나로 귀일시키려는 시도이며, 주자의 시각에 기초하되 퇴계의 독자적 해석이 드러난다.
특히 눈에 띄는 형식적 특징은 정확한 우리말 번역을 통한 경전 해석이다. 퇴계는 우리말 어휘의 뉘앙스를 엄밀히 구분하여 해석에 적극 활용했고, ‘사서대전본’이라는 정본 텍스트의 한계와 자신의 주자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해석을 전개하였다. 이는 우암학파 등 후대 일부에게는 순정 주자학의 입장에서 비판받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말 번역을 위한 방법론적 실험과 독창적 해석의 시도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