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서절요』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황이 『주자대전』의 서간(書簡) 중에서 중요 부분을 발췌하여 편찬한 유학서이다.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라고도 한다. 『주자전서』는 9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이지만, 서간문이 48권에 달한다. 서간문은 글이 단편적이지만 자신의 사상을 집약해 상대에게 전달한 것이어서 주희의 학문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이황은 이 점에 주목하여 성리학 경전 연구, 정치, 사상 등에 관한 내용만을 추려서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주희의 사상을 총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리학 발달의 근간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이황은 중종의 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 반포된 『주자대전』 또는 『성리대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던 『주자전서』를 보게 되었다. 『주자전서』는 주희(朱熹)의 시문과 사상을 수록한 것으로 9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이다.
그 가운데에는 주희가 당시의 학자, 공경대부와 문인 등 각계의 인사들과 사회 · 정치 · 경제 · 학문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48권에 달하는 서간문이 포함되어 있다. 서간문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사상을 집약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서 당대의 유종(儒宗)이라는 존경 받던 주희의 학문과 사상도 이 서간문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이황은 이러한 점에 주목, 주희의 서간문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 것과 학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을 빼고 정주학의 핵심이 된다고 인정되는 성리학 경전 연구, 정치 · 사상 등에 관한 내용만을 추려서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만큼 이 책을 통해 저자인 주희의 대인 관계, 특히 사우 관계, 당시 주희와 교유하던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송나라의 역사, 그 시대의 용어와 방언 등도 알 수 있다. 또한 주자학의 입문서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논어』가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은 성현서로 인정되어 공자를 배우는 중요한 길이 『논어』임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주희를 배우는 기초 자료이며, 주희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료였다.
처음에는 48권에 달하는 『주자대전』의 서찰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추려 문인들을 시켜 초사(抄寫)해 14권 7책으로 만들었으나 간행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도 오사렴(吳思廉)과 왕백(王柏)이 『주자서』를 편찬하였다.
이에 이황의 문인들은 주희의 집주(集注)와 제설(諸說)이 이미 세상에 출간되었는데 서찰만은 널리 유포되지 않고 있음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 스승을 종용해 일록과 주해를 달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간은 1561년(명종 16) 황중량이 성주에서 간행하였다. 이어서 유중영이 1567년(명종 22) 정주, 김성일이 1586년(선조 19) 나주, 정경세가 1611년(광해군 3) 금산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의 내용을 분류하면, 권1·2는 시사출처(時事出處), 권3은 왕장문답(汪張問答), 권4는 여유문답(呂劉問答), 권5는 진육변답(陳陸辨答), 권6은 문답론사(問答論事), 권7은 문답경전(問答經傳), 권8∼18은 지구인문답(知舊人問答), 권19는 속집, 권20은 별집으로 되어 있다.
본래 이황의 편찬본은 14권 7책이었으나 초사하는 과정에서 18권으로 분량을 조절했고, 속집과 별집은 문인들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편차의 순서는 공경대부와의 서간을 우선 편차하고, 지구(知舊) · 문인들의 문답 순으로 배열하였다.
지구 가운데는 주희와 학문적인 견해의 차이로 논쟁을 벌였던 왕응신(汪應辰) · 장식(張栻) · 여조겸(呂祖謙) · 유청지(劉淸之) · 육구연(陸九淵)형제, 진량(陳亮) 등과의 문답을 시대 순으로 배열하였다.
매 권수에는 수록된 사람들의 약전을 기재하고 매 서찰의 제목 밑에 소주(小註)로 서신 왕래의 시기를 기록하였다. 서찰의 끝에는 고사 · 인물 · 지명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