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유팽수(柳彭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윤(柳潤)이다. 아버지는 진사 유영문(柳榮門)이며, 어머니는 안세언(安世彦)의 딸이다. 진사 유광문(柳光門)에게 입양되었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1570년(선조3)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 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맞이, 대접하였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예조참의 · 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溫祚廟)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경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까지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