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점사는 강원도 고산군 서면 금강산에 있었던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유점사는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 53불(佛)과 관련된 창건설화가 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 사람들이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이를 배에 태워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나라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가 신라의 안창현 포구에 닿았다. 현관 노춘이 나가 보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그 땅에 유점사를 지었다. 유점사는 31본산 시대에 60개의 말사를 관장했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사지(寺誌)에 따르면 원래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민지(閔漬)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有緣國土)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는 신룡(神龍)에 의하여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月支國)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다. 현관(縣官) 노춘(盧椿)이 나가 보니 불상들은 없고 바닷가의 나뭇잎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이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흰 개가 나타나서 앞장을 서서 따라갔더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찾아가서 그 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53불 중 3불이 없어지고 50불이 남아 있었다.
창건 이후 1168년(의종 22)에는 자순(資順)과 혜쌍(慧雙)이 왕실의 시주로 당우 500여 칸을 중건하였고, 1213년(강종 2)에는 강종이 백은(白銀) 1,000냥을 대선사 익장(益藏)에게 보내어 중수하도록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는 행전(行田)이 시주를 얻어서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1295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효령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信義) · 성료(性了) 등이 중건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惟政)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병대장 보감(寶鑑)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53불을 안치한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수월당(水月堂) · 연화사(蓮華社) · 제일선원(第一禪院) · 반룡당(盤龍堂) · 의화당(義化堂) · 서래각(西來閣) 등 6전(殿) 3당(堂) 3루(樓)가 있다. 이들은 1882년(고종 19)의 대화재 뒤 우은(愚隱)이 중창하였고, 근대의 대선사 대운(大雲)이 중수한 것이다.
이 중 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연화사인데, 이곳은 만일회(萬日會)를 열던 법회장소였다고 한다. 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 · 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이 밖에 문화유산으로는 『보살계첩(菩薩戒牒)』과 「보문품」이 있다. 나옹화상이 스승인 지공(指空)에게서 받은 『보살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金泥)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계문의 말미에 있는 ‘지공’이라는 수결과 산스크리트 게송(偈頌) 등은 모두 지공의 친필이어서 귀중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은자 「보문품」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고 영창대군이 참변을 당하였을 때 슬하에 남은 외동딸을 위해서 불보살의 보호를 받으려는 간곡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필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