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

바티칸시국의 국기
바티칸시국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교황을 중심으로 바티칸 시국(Città del Vaticano)과 로마 성청(교황청|Curia Romana)을 다스리는 아탈리아 로마시의 가톨릭 교회 행정 중앙기관.
이칭
이칭
바티칸시국, State of the Vatican City, 로마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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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교황을 중심으로 바티칸 시국(Città del Vaticano)과 로마 성청(교황청|Curia Romana)을 다스리는 아탈리아 로마시의 가톨릭 교회 행정 중앙기관.
개관

교황청은 교황을 중심으로 바티칸 시국과 로마 성청을 다스리며, 세계 가톨릭 교회 및 교도를 통솔한다. 교황청은 The Holy See로 지칭되며 그 뜻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자 대변자이다. 로마시 바티칸 언덕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로, 성베드로대성당, 성베드로광장, 교황의 거처 및 교황청사무실이 있는 궁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0.44㎢, 인구는 약 800여 명(2017년 기준), 수도는 바티칸(Vatican City)이다.

인구의 85% 이상이 이탈리아인이며,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주로 사용되고, 프랑스어와 영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100% 가톨릭교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보조금 및 바티칸 소유 부동산과 바티칸은행의 투자수익, 그리고 세계 각국의 가톨릭협회로부터 온 기부금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들여오는데, 물품에 대한 관세는 부과되지 않는다.

바티칸의 정체는 교황제이며, 교황 아래 수상격인 국무장관 추기경이 있다.

약사

가톨릭교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하여 공인된 이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여, 1859년 교황이 이탈리아 중앙부를 중심으로 1만 8,000㎢에 달하는 지역과 3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일으킨 빅토르 엠마누엘(Victor Emanuel)이 1870년 교황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마시를 점령함으로써 교황의 세속적 권력행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간에는 교황청의 지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관한 ‘로마문제(Questio Romana)’가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1929년 2월 교황청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Mussolini, B.) 정부 사이에 라테란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기본협정·재정협정 및 종교협약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조약에 의하여, 가톨릭은 이탈리아 내에서 법률로 특권을 보장받는 국교로 공인되었고, 바티칸은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바티칸은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 정권 때 체결된 라테란조약은 현시대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내용이 있으므로 이를 개정해야 한다는 이탈리아 내의 여론으로 인하여,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조약 개정을 위한 교섭이 1967년경부터 추진되어 오다가 1984년 2월 종교협약을 개정, 전문 16조의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다.

신협약으로 가톨릭은 이탈리아 국교로서 지위를 잃게 되었고,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제도가 폐지되는 등 이탈리아 내에서의 가톨릭 특전이 크게 축소되었다.

교황은 바티칸의 통치자일 뿐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전 세계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 통치권을 지닌다. 교황은 종신제이며,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는 2013년 3월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세부 행정 등에 관한 사항은 국무성·성성(聖省)·사무국·법원 등으로 구성된 행정부(Roman Curia)에서 시행한다. 국무성의 책임자인 국무장관은 교황을 직접 보좌하는 가장 긴밀한 직책이고, 일반 국가의 수상급에 해당된다.

교황청 내의 방어와 질서는 약 100명의 스위스 경호대에 의하여 유지되며, 외곽 치안은 이탈리아경찰이 담당한다. 바티칸은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의 추구, 국가와 교회간의 조화 및 협력추구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자유를 가장 선명히 표방하며, 선교활동의 자유보호를 위하여 종교의 박해에 대해서는 과감히 반대하고 있다. 1994년 말까지 149개국(EC 포함)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1994년 6월 이스라엘과 10월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정식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또한, 제3세계 발전기금의 설립을 호소하는 등 제3세계의 권익옹호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의 교회와 교황청이 정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31년이나, 우리나라가 교황청의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60년이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더 7세(Alexander Ⅶ)는 중국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1660년 남경대목구(南京代牧區)를 설정하면서 조선을 그 안에 포함시켰다. 이 후 1702년 조선은 북경주교(北京主敎)의 관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본격적으로 북경교구의 관심사가 된 것은 조선에 교회가 탄생한 이후였다. 조선 신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들여와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외국인 신부를 데려왔고, 교리를 전파하여 1784년 교회를 탄생시켰다.

북경교구는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소식을 듣게 되었고, 1790년 북경에 온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이승훈(李承薰)의 서한을 통하여 조선교회의 기원과 발전에 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북경교구는 이 소식을 로마에 정식 보고하고 조선에서 포교할 책임자를 시급히 선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1792년 조선교구를 북경주교에 위임하고, 조선교회를 위하여 500은화의 원조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통고받은 북경교구에서는 조선에 선교사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1801년 순교하고 말았다. 한편 1801년의 신유박해로 거의 전멸상태에 있던 조선교회는 10년 만에 재기, 1811년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을 재차 요청하였다.

이에 북경주교는 선교사 2명의 파견을 시도하였으나, 이들이 모두 조선 입국에 실패함으로써 조선교회의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조선교회는 이에 교황에게 또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만이 아니라 선교의 보장책도 강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당시 포교지역문제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진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는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였다.

그 뒤 1857년 교황 비오(Pio) 9세는 조선교회의 순교자 가운데 82명을 시복(諡福: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덕행이 뛰어난 사람이 죽은 뒤에 복자로 추대하는 것)에 필요한 까다로운 절차를 면제시키고 가경자(可敬者: 가톨릭에서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붙이는 침호)로 인허하였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이들 82명 중 79명을 복자(福者: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인정하여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 대상이 된 사람)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는 24명의 새로운 복자시복식을 집전하였다. 이들 103위 복자는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여의도광장에서 집전한 103위 시성식(諡聖式)에서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었다.

한국교회에는 1962년 3월 교황의 친서를 통하여 교계제도가 설정됨으로써 11개 교구가 모두 정식교구로 승격되었고, 그 중 서울·대구·광주가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또한, 1969년 최초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바티칸은 1949년 4월 우리나라를 승인하였고, 1954년 4월 27일 서울에 상주 교황 사절을 설치하였다. 이미 1919년에도 교황 사절이 우리나라에 파견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주재 교황 사절이 한국 교회의 교황 사절을 겸임한 것에 불과하였다. 한·바티칸 양국은 1963년 12월 11일 외교관계를 공식 수립하여 서울의 교황 사절단이 공사관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우리나라는 1974년 4월 바티칸 주재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한·바티칸의 관계는 한국 정부 및 교회 측의 초청에 따라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식 방한함으로써 더욱 증진되었다. 방한 중 양국 원수는 이례적인 정상회담 공동 발표문을 통하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였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남북한 이산가족이 하루속히 재회할 것을 희망하였고, 북한 내 가톨릭교도들의 근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미얀마에서의 폭력사태를 개탄하였다. 또한, 교황은 5월 6일 한국 103위 성인 탄생을 선포하였다.

교황의 두 번째 방한은 1989년 10월 제44차 세계성체대회(世界聖體大會: 그리스도가 정한 7대 성사의 하나인 성체성사의 전례행사로 신심을 높이기 위한 로마가톨릭 신자들의 집회) 때 이루어졌다.

교황청 내의 한국인 체류자는 1997년 10월 기준으로 70명인데, 이들은 모두 성직자로 신부와 수녀들 및 신학생들이다. 2007년 주 바티칸 대사가 부임하여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6회 가톨릭 아시아청년대회 및 윤지충 바오로 등 124위 시복식 집전을 위해 방한하였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2000년 김대중 대통령, 2007년 노무현 대통령, 2009년 이명박 대통령,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하였다.

한편, 바티칸과 북한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광복 당시 북한에는 평양·함흥·덕원의 3개 교구에 8만 명의 신도가 있었으나, 그 근황은 알려지지 않아 교황은 이들의 근황을 우려하는 한편, 북한 내 종교부재상황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해 오고 있다.

1950년 7월 북한군은 당시 서울에 체재하던 교황 사절 방(Bynre) 주교도 납북해 간 바 있다. 1982년 북한곡예단이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이들은 교황 알현을 신청하였다가 그 뒤에 일방적으로 그 신청을 취소한 적이 있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바티칸』(Paul Poupard 저, 백민관 역, 성바오로출판사, 1969)
VATICAN CITY STATE(www.vaticanstat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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