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령은 죄와 벌을 규정한 현재의 형법에 해당하는 ‘율’과,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각종 제도 등을 규정한 비형법적인 ‘영’을 결합한 용어로, 원래는 ‘법률제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율령은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발전한 법과 제도’를 뜻하는 고유한 용어로 통용된다. 그런 면에서 율령제란 중국적인 율령에 규정된 각종 제도에 의해 운영되는 지배 방식 혹은 지배 체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율령제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국가를 율령국가라고 한다.
그런데 율령이란 이름은 중국 왕조들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에 입각한 지배 체제 역시 중국 왕조들에서 성립 · 시행되었지만, 율령제나 율령국가의 개념은 중국사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율령제에 의해 고대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율령국가’가 고대 국가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율령제가 일본이 받아들인 중국식 율령에 입각한 국가 통치 방식으로서 체계화된 개념이어서, 율령제 개념에서 율령은 일반적 의미의 법률제도나 율령이라는 이름 가진 중국 법률제도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일본에 들어온 율령인 수 ‧ 당 대 율령에 한정하고 있는데, 조금 넓게는 진(晉)나라의 태시율령(泰始律令)부터를 율령제의 바탕이 되는 율령이라고 보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율령제 개념은 국가 체제나 통치 방식이 중심이다. 즉 형법인 '율'보다는 행정법인 '영'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진한(秦漢) 대에 율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어디까지나 형법인 '율'이 중심이고 '영'은 부수적이면서 법률제도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 율령을 원시(原始) 율령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율'을 중심으로 한 중국 율령이 진나라의 태시율령부터 바뀌게 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태시율령에서 '영'이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적인 법전으로 편찬되고, 그 영전이 이전과는 다르게 율전과 대등한 위상을 가진 법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치제도로서 '영'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율'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영'이 제정되고 통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율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나라 태시율령에서 시작된 이러한 형식의 율령은 당나라에 이르러 완성되는데, 소위 율령격식(律令格式)의 법전 형식을 갖춘 것을 완성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송 대 이후 율령격식의 법전 형식이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데, 이를 율령의 쇠퇴로까지 표현하면서, 당대 율령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편 율령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당나라 율령에서 보여지는 사회 ‧ 경제적 발전 단계와 그에 걸맞는 통치제도와 국가 체제를 율령제로 개념화하고 있으며, 이는 율령제 성립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의 체제 전환, 곧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율령제 개념을 단순히 중국 율령에 입각한 통치제도와 지배 체제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 경제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특정한 체제의 성립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로 ① 씨족제적이고 분권적인 지방 지배에서 중앙집권적 군현제로의 이행, ② 족제적 관인 체제에서 선거적인 관인법에 의한 관료 체제로의 전환, ③ 족제적인 신분 질서에서 양천제에 기반한 신분 질서로의 변화, ④ 지배층의 사적인 영토와 인민 영토에 입각한 공동체적인 지배 질서에서 토지 국유제에 입각한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 적장제(籍帳制) 등의 국가 재정 시스템을 통한 인민에 대한 직접 지배로의 전환, ⑤ 지배층의 사병적 군제에서 율령제적 징병제도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결국 율령제는 율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법률제도에 따라 통치하는 체제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 지배 시스템이면서 발전된 사회를 반영하고 그에 걸맞는 것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을 정리하면, 지역별 유력자들의 사적인 지배 원리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권이 관료제를 통해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에 입각하여 영역 내를 균질적으로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율'과 ‘영’ 가운데 지배 시스템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영'이 이 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율령제 및 율령국가를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모두 적용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보기 힘들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가장 먼저, 율령제 · 율령국가 개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율령이라는 용어 자체와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가 가장 먼저 시행되었던 중국 왕조들이다. 중국 왕조에서 율령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법제의 의미로 통시대적으로 사용되었고,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 다시 말해 강력한 황제권과 관료제 역시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율령’을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중국 왕조에서는 율령제나 율령국가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율령제와 율령국가의 개념은 중국 왕조보다는 주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정하여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율령제 혹은 율령국가의 개념은 후진적인 중국 주변 국가에서, 중국의 강력한 황제권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료제에 의한 국가 통치 방식을 내재하고 있는 율령을 도입함으로써, 국가 체제의 일대 전환을 이룩하여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모델로서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율령국가를 사회경제 발전에 따른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고 동아시아 율령국가군을 상정하기에 이른다. 즉, 사회 구조와 발전 단계가 중국보다 뒤떨어진 국가들이 보다 발전한 중국의 율령법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문명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율령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일본 고대사학계에 의해 체계화된 협의의 율령제란 고대 국가 통치 방식 발전의 궁극적 도달점이라는 인식을 기본적으로 내포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중국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이 율령제를 성립시키지 못한 것을 사회 발전 단계가 뒤쳐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아가 율령제와 율령국가 개념을 중국 주변 국가들에 한정시키면서도 일본의 사례를 보편적 사례로 규정해 버리고, 이와 동일한 양상이 아닌 경우 발전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기 쉽게 만든다.
이러한 율령과 율령제에 대한 이해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그대로 영향을 주었는데, 그 결과 한국 고대사에서는 율령의 반포와 율령제의 실시가 일치하지 않게 되는 현상도 벌어진다. 예컨대 고구려나 신라에서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분명한 기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령제는 없었다는 논리가 나오기도 한 것이다. ‘율령’이 있지만 ‘율령에 입각한 율령제’는 아니다라는 모순적인 상황이 상정되었고, 이는 율령을 만들어 시행하였다는 기록과 달리 사실상 율령이 없었다는 논리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일본의 율령제가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율령제’ 국가가 아니라 ‘율령형’ 국가로 보자는 율령형 국가론이 제창되기도 하였다. 이 ‘율령형 국가론'은 기본적으로 삼국을 율령에 입각한 지배 체제가 관철되는 국가로 본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어, 일본 고대사에서 구체화된 율령제 · 율령국가 개념에 입각하여 3국의 율령을 부정하는 입장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율령제’를 전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논리에 입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운 점이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일본의 율령제 · 율령국가론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신장한 왕권 중심의 권력 구조와 중앙정치제도의 정비와 연관하여 율령제를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율령 반포의 전제 조건으로서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도 중대 이후에 당나라 율령의 영향 아래에서 율령제를 지향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중대 이후 신라의 체제를 설명하면서 왕권의 전제화와 관료제의 발달을 그 특징으로 꼽는 것은 율령제에 대한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3국의 경우 구체적인 모습을 사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큰 제약이 된 점은 분명히 있지만, 총체적 지배 시스템으로서 3국의 율령제를 고찰하기보다는 중앙정치제도에 큰 방점을 두고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을 고대 국가의 발전적 모델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으로 말미암아 율령 반포 이후의 3국의 국가 체제는 일본사에서의 율령제 · 율령국가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율령제 · 율령국가 개념을 발전적이고 선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큰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율령제와 그 이전 단계를 커다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었고, 율령제는 획기적인 전환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율령 반포 전과 이후를 연속적인 면으로 이해하기보다 단절적 전환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해, 그 체제상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연구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자료에 나타난 모습을 분석하여 한국 고대 국가들의 율령제를 이해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율령제의 내용에 맞추어 자료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 고대의 정치 · 경제 · 사회의 여러 모습을 통해 신라의 율령과 율령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사에서 개념화된 율령과 율령제를 전제로 하여 3국에 그러한 율령이나 율령제가 있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문제점들이 있었다.
최근 중국에서 진한 대 법률 관련 출토 문자 자료가 다수 출토되면서, 중국사에서의 율령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율령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즉, 수 · 당 대 율령의 형식과 내용이 진정한 율령과 율령제이고, 그 이전은 후진적이라는 인식이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고대사에서는 수 · 당 대 율령과 다른 형식과 내용을 가진 것이, 고유의 후진적 법률체계를 고수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진한 대부터 중국과 많은 교류를 하면서 율령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영되어 있는 국가 체제와 통치제도를 흡수하였던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백제 지역 출토 문서 목간들, 신라의 「 포항 중성리 신라비」, 「 포항 냉수리 신라비」, 「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 당대 국가 통치 과정에서 만들어진 석비 비문들과 행정 집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목간 자료들이 연이어 출토되면서, 한국 고대 율령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출토 문자 자료들이 발견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개념화된 율령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고대 율령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후대 일본 율령에 의존하지 않고, 비슷하거나 앞선 시기 중국 자료들과 직접적으로 비교하여 한국 고대 율령의 실체를 비롯하여 한국 고대 국가의 통치 방식과 국가체제로서의 율령제를 밝힐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한국 고대 율령 자체를 분석하여 율령제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를 확대해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아가 율령제를 발전에 따른 획기적인 전환으로 이해하고, 율령제 이전과 이후를 단절적으로 보는 시각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