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우방의 지원으로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1964년 당시 미 지상군에게 안보의 한 축을 의탁하고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베트남의 사태를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박정희 정부는 존슨 대통령의 파병 요청 이전부터 베트남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의 요청과 함께 남베트남 정부에서도 파병을 요청해 오자,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시 참전한 우방국에 보답한다.”는 명분과 “베트남 전선은 한국 전선과 직결되어 있다.”는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파병을 결정하였다.
정부의 파병 결정에 따라 제1차 파병으로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 등 140명이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22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이후 제1이동외과병원은 붕타우에 주둔하고, 태권도 교관단은 육·해군 사관 학교와 육군 보병 학교에서 남베트남군을 지도하게 되었다.
제1차 파병에 이어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추가 파병을 요청받은 정부는 2차로 후방지원과 건설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국군의 해외 추가파병에 대한 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본부’를 창설하여 평화를 상징하는 뜻의 비둘기 부대로 명명하였다. 창설된 한국군 군사원조단은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였다.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의 베트남 상황은 미국의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 루트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남파가 계속되면서 남부의 전 지역에서 지상전이 가열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부대 파병을 요청해왔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남베트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파병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브라운 대사에게 제시하였던 요구 사항은 1965년 5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10월 12일 여의도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임석하에 파병되는 수도사단의 환송식이 열렸으며, 수도사단은 11월 1일까지 퀴논에, 제2해병여단은 10월 9일 캄란에 도착함으로써 제3차 파병이 마무리되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눈부신 활약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투 병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고 있던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작전 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군 전투 병력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한국 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기계화사단 (맹호부대) 제26연대는 4월 15일 퀴논에 상륙하여 수도사단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제9사단은 10월 8일까지 닌호아 일대에 전개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TV와 신문 등 언론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69년 1월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남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이 수행하게 한다.”는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일부 병력을 철수시키자, 전투 부대를 파병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일랜드 등 연합국도 이에 동조하여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972년 초에는 100여 명 정도의 상징적인 병력만을 잔류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주베트남 한국군의 병력은 47,86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71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파병 병력의 철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476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반면 2개 보병 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투 병력(37,000여 명)은 1973년 초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 잔류시켰다. 이로써 주 베트남 한국군의 병력 규모는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지상군 규모를 능가하여 참전국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으로 남베트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주베트남 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잔류 부대의 철수를 지시한 국방부 훈령(1973.1.26)에 의해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은 조약 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며, ‘자유 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은 한반도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파병은 당시의 한국 정부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 전략으로써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한국군의 남베트남 파병과 관련하여 미국으로부터 국가 안보를 위한 군사 원조와 함께 장병들에게 일정액의 전투 수당이 지급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 같은 군사 원조나 전투 수당을 목적으로 파병을 협의하였거나 파병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파병은 처음부터 파병 목적이 명확하였고, 한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 하에서 작전에 임하였기 때문에 ‘용병’이라는 말은 일부 인사들의 잘못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