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1952년도에 접어들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에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국군 경계병과 포로들과의 알력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포로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정하여 폭동을 유발시킨데 있었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수용소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이들을 상호 격리 수용하는 한편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하여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소위 제62동 수용소는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유엔군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952년 2월 18일 오전 조사팀이 조사준비를 하여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포로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포로측에서는 55명이 즉석에서 사망하고 22명이 후에 사망하였으며 140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동년 2월 23일 판문점 공산군측 대표단은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를 하였다. 분명 이 사건은 유엔군측 대표단에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수용소내의 폭동과 사건은 계속되었다. 3월 13일에도 포로막사 옆으로 지나가던 경비대 행렬에 막사내의 포로들이 무차별 투석전을 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충돌에서 포로 즉사 10명, 치명상 2명, 부상으로 후송 26명이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약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하여 수용소측에서는 포로를 적절히 다룰 수가 없었다. 이는 포로를 보호하는데 집착한 나머지 포로에 대한 대우와 포로수용국의 제한조치만을 규정하고 있는 반면 포로가 조직체를 형성하여 포로수용국에 위협을 가하는 사태에 대응할 조항은 담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1952년 5월 6일 제76포로막사의 포로들은 경비병에 의한 폭행과 수용소내의 금품수색을 구실로 헌병대대장과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헌병대대장으로부터 이에 대한 조사를 확약받은 포로들은 다시 포로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수용소장 돗드 준장은 포로명단 작성을 위해 면담에 응하기로 하였다.
5월 7일 오후에 돗드 장군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 중에 일단의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수용소장이 포로들의 계획된 음모에 빠진 것이었다. 피랍은 미 제2군수사령관을 통해 즉시 미 제8군사령관에게 보고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승인 없이 무력사용에 의한 구출작전은 불허한다는 지시를 내렸으며 제2군수사령관은 설득에 의한 구출을 시도하였다.
포로수용소장 납치에 성공한 포로들은 요구사항을 작성하기 위하여 수용소측의 허락을 받아 포로수용소내의 모든 포로지도자들을 제76포로수용소 막사로 모이게 하였다. 포로들의 최초요구는 각 막사간에 전화 시설을 갖추고 포로조직을 인정하라는 등 7개항이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사건에 긴급 대처하기 위해 미 제1군단 참모장 콜슨(Charles F. Colson)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콜슨 준장을 통해 돗드 준장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는 요구서를 포로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콜슨 준장은 수용소주변에는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실제로 콜슨 준장은 5월 10일을 목표로 제76포로수용소를 무력으로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포로들은 이에 대해 강경히 맞서 대담한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콜슨 준장은 공산군 포로단체를 인정하였지만 송환문제는 그의 재량권 밖이었다. 콜슨과 돗드 준장과의 전화통화가 있었는데 돗드는 ‘포로들이 살해된 적이 있었음을 시인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포로들이 필수적이라고 요구하는 사항들을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콜슨은 돗드의 제의에 동의하고 일단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회신하였다.
이러한 약속을 얻어낸 친공포로들은 돗드 장군을 1952년 5월 10일 저녁 석방하였다. 그러나 콜슨이 포로들에게 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다. 돗드 준장이 석방된 후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후임인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즉각 콜슨의 협정을 공갈에 의한 것이라며 무효를 선언하였다. 그는 공산포로 자체내의 지휘자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하여 포로들이 사망하였고, 또 이곳 포로수용소에는 국제적십자사대표나 기자단 대표들이 항상 자유롭게 방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콜슨 장군을 즉각 해임하고 미 제2사단 부사단장 보트너(Haydom L. Boatner)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한 즉시 거제도 경비대를 증원하도록 명령하여 5월 20일까지 제187공정연대전투단과 전차 1개 대대를 증강시킴으로서 전체병력이 14,820명에 달하였다.
돗드의 피랍사건은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에게 좋은 선전무기가 되었다. 회담석상에서 수석대표 남일은 콜슨의 회신문에 기초하여 “끝없는 일련의 유혈사건이 유엔군측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유엔군의 이른바 포로조사라는 것이 공산군측 포로들을 강제로 잡아 두려는 음모임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포로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원들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협상에서의 공산군측의 입장을 지원하며 유엔군의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유엔군에서 제안한 일괄타결안도 포로사건과 맞물리어 타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