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중성리 신라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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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현존 가장 오래된 비. 신라비.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현존 가장 오래된 비. 신라비.
개설

201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009년 5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 거주하는 김헌도씨가 북구 흥해읍 중성리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되었지만, 정밀 측량 결과 발견 지점이 중성리로 확인됨으로써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명칭을 바꾸었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자연석 화강암 한 면에만 고졸한 예서체로 행별 최대 21자, 12행 203자 정도를 음각하였다. 비석은 비면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일부 획이 남아 있는 4자, 결락된 4자를 제외한 195자의 글자를 모두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다. 비석 하단부 약 20㎝ 공간은 글자를 새기지 않고 비워 놓았다.

내용

중성리 신라비가 발견되고 나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비석을 세운 연도, 문장 구성, ‘본모자(本牟子)’와 ‘쟁인(爭人)’의 성격, ‘모단벌(牟旦伐)’과 ‘탁평(啄評)’, ‘금평(金評)’, 그리고 인명과 지명의 구분 등이었다. 이러한 쟁점에도 불구하고 이 비는 대체로 포항 지역의 모종의 분쟁에 대하여 신라 6부가 심의하여 결정한 사실을 교(敎)로써 공시한 것으로 본다.

이 비의 가장 핵심인 건립 연도는 비문 첫 머리의 ‘신사(辛巳)’년을 어느 시기로 보느냐에 따라 501년(지증왕 2)설과 441년(눌지왕 25)설이 있다. 대체로 비문의 형식, 문체, 글자의 용법, 관용구 등이 냉수리비와 거의 같으면서 이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501년설이 유력하다.

전체 문장 구성에 대해서는 본모자(本牟子)와 백쟁인(白爭人)의 풀이가 주요한 쟁점이었다. 본모자(本牟子)에 대해서는 본모(本牟)를 인명으로 본 ‘본모의 아들’, ‘본모자’ 전체를 인명으로 본 견해, 그리고 감시하는 직함으로 본 ‘본래의 모자’, 원래의 소유자, 고위자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은 하급관리로 본 ‘본디 모자’,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고 쟁인의 평의 결과를 보고하는 역임자, 그리고 모자를 경주 동쪽 모지정(毛只亭)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아 본모자 이하 백(白)까지를 ‘본래 모자 지방의 누구누구라고 사뢰었다’고 풀이하기도 하였다.

쟁인에 대하여는 백쟁인을 ‘사뢰는 사람’으로 보거나, 쟁인 만을 따로 떼어내어 소송을 제기한 사람, 분쟁을 일으킨 사람, 또는 왕경의 지배층에게 분쟁의 판정을 호소한 사람, 쟁송을 실무선에서 제기한 사람, 쟁송의 심의와 판결 전의 1차 평결을 맡았던 사람 또는 분쟁의 당사자, 그리고 냉수리비의 7왕등과 같은 역할 곧 쟁의(爭議)하는 소임을 맡은 사람 등으로 풀이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는 전체 문단을 교(敎), 백(白), 령(令), 운(云) 등의 동사로 문단을 구분하고, 다른 글자에 비하여 대략 1.5배 내지 1.8배 정도 큰 글자로 씌여진 ‘교(敎)’ 이하 ‘고기(故記)’ 앞까지를 교의 내용으로 본다. 교를 받은 객체에 대하여는 중고기 신라비에서 교를 받는 대상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체로 모든 신라인에게 고시하는 성격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 문단의 ‘그러므로 기록한다(故記)’는 교가 있었으므로 기록한다는 의미이며, ‘사탁심도리공(沙喙心刀哩公)’은 이 글을 쓴 자 내지 비를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비는 쟁인으로 표현된 6부가 모종의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사인인 도사를 통하여 이 문제와 관련된 거벌고리촌·고리촌·나음지촌·진벌 지역, 곧 지금의 경주 동쪽 일원과 포항 지역을 아우르는 지방민에게 영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의 내용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연구자에 따라 금광, 주민, 식읍, 토지에 대한 권리(수조권), 궁(宮) 등을 돌려준다는 의미로 추론하기도 한다. 이는 두 개의 궁 이하의 글자를 빼앗을 ‘탈(奪)’자로 석독한 결과이다. 이를 냉수리비 ‘칠왕등(七王等)’의 ‘등’과 동일한 이체자로 석독하고 교의 첫 문장을 이 비의 쟁송이 있게 된 배경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모자 지역의 지방민이 왕경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다가 쟁인의 협의를 거쳐 다시 본래 지방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는 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 비에는 울진봉평신라비에서 일컬은 신라 6부의 이름이 501년 당시에 탁·탁부·탁평, 사탁부, 모참벌, 본피, 금평 등으로 일컬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탁·사탁부 출신의 귀족들 가운데 궁(宮)을 소지한 자들은 개별적인 사인(使人)을 두었는데, 이는 국왕의 개별적 사인으로서의 도사(道使)와 같은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탁부·사탁부가 ‘[국왕(갈문왕)]-아간지-일간지-사간지-거벌간지-나마’의 관등체계인데 대해, 왕경 여타 4부는 ‘간지-일벌’, 그리고 지방 촌의 경우 ‘간지-일금지’의 체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비는 501년 당시 지증왕의 개혁정치와 관련된 왕경 6부의 구조 뿐만 아니라 관등체계 및 골품제의 정비과정, 지방 지배 체제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인정된다.

참고문헌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박남수, 주류성, 2013)
『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이기동 외, 주류성, 2012)
『한국고대사연구』59(한국고대사학회, 2010)
『포항중성리신라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9)
『한국고대사연구』56(한국고대사학회, 2009)
「포항중성리신라비의 구조와 내용」(주보돈, 『한국고대사연구』65, 한국고대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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