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년(경문왕 12)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 처음으로 보이며, 성전(成典)·속감전(俗監典)과 함께 목탑의 중수체계를 이룬다.
성전의 경우 신라 중대에 설치된 사원성전(寺院成典)의 직원구성과 유사한 반면에, 도감전은 승관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① 위의 찰주본기에 보이는 도감전을 단순히 황룡사 9층목탑의 불사에 관계한 승려들로 보는 견해.
② 사원성전을 승단의 통제 관리를 위한 관사적(官寺的) 기구로 파악하면서 도감전을 승려에 대한 교학(敎學)의 수련과 계율(戒律)을 감독하는 기구로 보는 견해.
③ 원성왕 원년에 정법전(政法典)을 설치하면서 이전에 신라 불교교단의 실무를 담당한 세속 관원인 대사(大舍)·사(史)를 승려들로 대체함에 따라 종래 속관들이 맡았던 속무(俗務)를 9세기 중엽 경에 속감전에서 맡게 되었고, 전국통(前國統)·대통(大統)·정법화상(政法和尙) 등의 승관이 속한 도감전은 순전히 불교사무만을 맡았다는 견해.
④ 국가체제와 연관된 국가불교의 사원으로 정관사원(政官寺院)·성전사원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도감전은 승단의 자율적 청정화의 기능을 담당했던 정관사원의 기능을 담당한 기구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7∼8세기 무렵 국가·왕실에서 일으킨 불사에는 인적 구성상 속관만으로 구성된 성전과 승·속으로 구성된 조영체계가 있었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의 주조(771) 이후 속관만으로 구성된 조영체계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국가·왕실에서의 불사는 성전-도감전-속감전의 체계하에서 진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하대 말엽에 이르러 불사의 조영체계가 점차 도감전(道監典, 또는 三綱典)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감전만으로 경영된 불사는 대체로 개인의 발원에 의해 주로 승장들이 참여하고 있다. 곧 성전과 도감전으로 구성된 조영체계가 국왕·왕실에서 불사를 경영할 때의 체계라고 한다면, 도감전만으로 경영된 불사는 개인의 발원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개인이 발원한 불사의 경우 최소한 9세기 초부터는 각 사찰의 승려·승장들을 중심으로 경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8세기 이후 불사의 경영체계는 국가·왕실의 발원에 의한 성전과 성전·도감전의 체계, 그리고 개인의 발원에 의한 도감전만의 체계가 함께 존재하였다. 그러나 중대 말·하대 초부터 국가의 불교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면서 점차 성전만의 체계는 사라지고 사찰 자력에 의한 조영체계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감전만으로 추진된 불사일지라도 종을 만드는 경우에는 8세기 말엽까지 주로 관등을 가진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초엽부터 사찰은 주종 승장까지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대 말·하대 초에 불사를 조영하는 체계가 바뀌게 된 것은 국가의 불교정책이나 불교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대의 강력한 왕권에 의해 통제·운영되던 사원성전이나 불사의 조영은, 중대 말·하대 초에 이르러 점차 불교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승관제가 정비되고 불사의 조영체계가 점차 도감전(삼강전) 중심으로 바뀌어가며, 『삼국사기』 직관지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사원성전’이 점차 위축되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