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년(경문왕 12)에 황룡사9층목탑을 중수할 때 목탑 공사를 지원하였던 기구는 크게 세 부류로 구성되었다. 첫째 부류는 중수 공사를 감독하고 행정 운영을 총괄하였던 상설기구인 황룡사 성전(成典)이다. 둘째 부류와 셋째 부류는 목탑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승속(僧俗)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조직된 임시기구이다.
하나는 승정기구(僧政機構)의 승관(僧官)들로 구성된 도감전(道監典)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 및 지방행정 관료, 즉 속관(俗官)들로 구성된 속감전이다. 속감전을 구성하였던 관료들의 면면을 보면 황룡사9층목탑의 중수와 관련하여 왕실과의 연락사무나 재정적 지원을 위하여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보면, 속감전은 패강진도호(浿江鎭都護) 중아간(重阿干) 김견기(金堅其)를 필두로, 집사시랑(執事侍郞) 아간(阿干) 김팔원(金八元), 내성경(內省卿) 사간(沙干) 김함희(金咸熙), 임관군태수(臨關郡太守) 사간(沙干) 김욱영(金昱榮), 송악군태수(松岳郡太守) 대나마(大奈麻) 김일(金鎰) 등 5명의 고위 관료로 구성되었다.
김견기가 중아간으로 중위제(重位制) 적용 대상자이고, 패강진도호, 집사시랑, 내성경이 6두품을 역임하였던 최고위의 내외관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대부분 6두품 신분으로 목탑 중수의 실무 행정과 관련하여 속감전에 소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가운데 우선 집사시랑은 집사부의 차관으로써, 9층목탑의 중수와 관련된 왕명의 출납과 왕실과의 각종 연락사무를 담당하였다. 내성경은 왕실 재정을 담당하였던 내성의 차관으로써, 목탑의 중수에 필요한 각종 재원의 마련과 지원사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패강진과 송악군(지금의 개성) 방면은 나당전쟁 이후 왕실이 새롭게 점령하였던 지역으로 왕실의 중요한 재정원이었다. 패강진도호와 송악군태수는 목탑 중수에 필요한 실질적인 재정을 지방에서 충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견기는 중수 공사가 개시된 871년(경문왕 11)에 애초 강주(康州)의 차관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곧 패강진도호로 임명되었다. 끝으로 임관군(지금의 울산)은 왕경 인근의 지역이라는 점에서 임관군태수는 목탑 중수에 필요한 공역의 요역 동원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