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이 시중으로 있을 때 759년(경덕왕 18) 신라의 고유 지명을 비롯해 기존의 관청과 관직 등 관호(官號)를 중국식으로 개명하였고, 그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된 직후인 776년(혜공왕 12)에 지명과 관호를 종전대로 복구하는 하교(下敎)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경덕왕을 도와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혜공왕을 시해한 인물로 전하는 김양상(金良相)이 774년(혜공왕 10) 상대등에 임명된 이후 정문이 775년 3월 시중에서 물러났고, 이어 8월에 염상이 정문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여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염상의 반란은 당시 상대등 김양상의 권력 확대에 반대하고, 혜공왕을 옹위하기 위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