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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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시중을 지낸 진골 귀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775년(혜공왕 11)
주요 관직
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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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염상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을 지낸 진골 귀족이다. 그가 시중으로 있을 때, 759년(경덕왕 18) 신라의 고유 지명을 비롯해 기존의 관청과 관직 등 관호(官號)를 중국식으로 개명하였고, 그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된 직후인 776년(혜공왕 12)에 지명과 관호를 종전대로 복구하는 조치가 단행되었다는 점에서 경덕왕을 도와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던 친왕 세력의 일원으로 보고 있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시중을 지낸 진골 귀족.
인적 사항

758년(경덕왕 17) 정월에 시중 김기(金耆)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으로 집사부의 시중( 중시)에 임명되어 760년 4월까지 역임하였다. 이후 775년( 혜공왕 11) 8월에 당시 막 시중에서 물러난 정문(正門)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그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력으로 보아 진골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활동

염상이 시중으로 있을 때 759년(경덕왕 18) 신라의 고유 지명을 비롯해 기존의 관청과 관직 등 관호(官號)를 중국식으로 개명하였고, 그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된 직후인 776년(혜공왕 12)에 지명과 관호를 종전대로 복구하는 하교(下敎)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경덕왕을 도와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혜공왕을 시해한 인물로 전하는 김양상(金良相)이 774년(혜공왕 10) 상대등에 임명된 이후 정문이 775년 3월 시중에서 물러났고, 이어 8월에 염상이 정문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여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염상의 반란은 당시 상대등 김양상의 권력 확대에 반대하고, 혜공왕을 옹위하기 위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지식산업사, 2014)
김수태, 『신라중대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74)

논문

최병헌, 「신라 하대사회의 동요」(『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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