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중시(中侍)를 역임한 외척 대신.
이칭
이명
유성(維誠), 위정(魏正)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통일신라 중시(中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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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유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중시(中侍)를 역임한 외척(外戚) 대신이다. 744년(경덕왕 3) 1월 이찬(伊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중시에 임명되어 745년 5월까지 재임하였다. 그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딸이 혜공왕의 비인 신보왕후(新寶王后)로, 외척(外戚) 권문(權門)이었다. 당시 그는 왕구(王舅)로서, 경덕왕과 결탁하여 그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중시(中侍)를 역임한 외척 대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유정(惟正)은 744년(경덕왕 3) 1월 이찬(伊飡)으로 집사부(執事部)중시(中侍)에 임명되어 745년 5월까지 재임하였다. 그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딸이 혜공왕의 비인 신보왕후(新寶王后)로, 외척(外戚) 권문(權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보왕후의 아버지는 『 삼국사기(三國史記)』 「혜공왕본기(惠恭王本紀)」에 유성(維誠),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 위정(魏正)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유정(惟正)의 다른 표기로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주요 활동

유정은 744년 1월 중시에 임명된 후 1년 5개월 만에 퇴임하였다. 그가 중시를 역임하는 동안 744년 겨울에는 큰 요성(妖星)이 하늘에 열흘 이상 나타났다가 없어졌고, 다음 해 4월에는 수도 경주에 계란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또 5월에는 가뭄이 들었다. 그가 중시를 짧게 역임한 것은 이러한 천재지변을 이유로 사직하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당시 신라의 중앙 정치는 왕명을 출납(出納) 하던 집사부의 중시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의 4대에 걸쳐 중시를 역임한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하였는데, 그 역시 딸을 혜공왕의 비로 들였다.

당시 유정은 왕구(王舅)로서, 경덕왕과 결탁하여 그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중시를 역임할 때 천재지변을 이유로 사직한 것도 경덕왕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지식산업사, 2014)
김수태, 『신라중대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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