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원

  • 역사
  • 인물
  • 남북국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중시를 지낸 진골 귀족.
인물/전통 인물
  • 사망 연도미상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통일신라 중시
  • 출생 연도미상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1년
  • 윤선태 (동국대 교수)
  • 최종수정 2022년 11월 1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예원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伊湌)으로 중시(中侍)를 지낸 진골 귀족이다. 671년(문무왕 11) 정월에 중시에 임명되었지만, 673년 7월에 일어난 아찬(阿飡) 대토(大吐)의 모반과 관련해 정치적 책임을 지고 673년 8월에 물러났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중시를 지낸 진골 귀족.

가계 및 인적 사항

예원(禮元)의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력으로 보아 진골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문무왕의 동생인 문왕(文王), 지경 등이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되었던 점에 의거해, 예원을 문무왕의 동생인 개원(愷元, 김개원)의 오기(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주요 활동

671년(문무왕 11) 정월에 지경(智鏡, 김지경)의 뒤를 이어 이찬(伊飡)으로 집사부중시(中侍)에 임명되어 673년 8월까지 지냈다. 예원이 중시를 역임한 시기는 당나라가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표출하고, 이에 신라가 대항하여 당과 전쟁에 돌입하였던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예원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의 임기가 평균 3년인 다른 중시(또는 시중)의 임기보다 짧고, 면직된 시기도 일반적인 봄이 아닌 8월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면직이 673년 7월에 일어난 아찬(阿飡) 대토(大吐)의 모반 사건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토는 당과 내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중시였던 예원은 나당전쟁 시기의 엄중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원전

  • - 『삼국사기(三國史記)』

  • 단행본

  • -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74)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