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는 물론 속인도 승관이 될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를 제외하고 승관을 살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신라의 승관직으로는 대서성(大書省)이 있었다. 자세한 임무는 알 수 없으나 550년(진흥왕 11)안장(安藏)이 최초의 대서성이 되었고, 647년(진덕왕 1)에는 1인을 더 늘여서 2인을 두었다.
삼국통일 후에도 이 제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대사성은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조정의 한 기관으로, 국가의 정교(政敎)에 관여하는 승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69년(문무왕 9)신혜(信惠)를 정관대서성(正官大書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대서성 외에 소서성(小書省)의 제도를 두었다. 787년(원성왕 3)에 이 제도가 시작되어 혜영(惠英)과 범여(梵如) 두 법사가 최초의 소서성이 되었다.
또한, 785년 원성왕은 재행을 겸비한 승려를 뽑아서 정법전(政法典)이라는 승관을 두었다. 정법전은 정관(政官)이라고도 하는데, 그 구성원으로는 대사(大舍) 1인, 사(史) 2인이 있었으며, 임기는 일정하지 않고 사고가 있을 때는 면직되었다.
고려시대의 승관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기구는 승록사(僧錄司)이다. 이 기구에 대한 기록은 고려 초기부터 나타나는데, 양가(兩街) 또는 좌가승록(左街僧錄)·우가승록·좌우양가도승통(左右兩街都僧統)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이는 모두 승록사 또는 그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승록사에는 좌우의 양가가 있고, 그 양가에는 각각의 도승록(都僧錄)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 부승록(副僧錄)과 승정(僧正)이 있었다. 도승록은 좌가 또는 우가의 승려와 교단의 제반 업무를 관리하고 모든 불교행사를 주관하였다. 양가의 승록 위에는 도승통(都僧統)이 있어서 전체 승록사를 대표하고 양가를 총괄 관장하였다. 이밖에도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등의 명칭도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에 대한 억압책이 강화되었고, 1424년(세종 6) 승록사를 폐지함으로써 국가에서 불교를 돌보는 승관직은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1902년 사찰통일의 취지를 관철하고 승단을 국가에서 관리하기 위해서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 이 관리서에서는 「사찰령」 36조를 반포하고 전국의 사찰 및 승려에 관한 모든 사무를 맡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