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적색노동조합 그룹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려다 실패한 공산주의 운동가로, 출생지는 함경남도 흥원군이다.
홍원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형과 함께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1930년 ‘조선공산당 재조직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검거된 채규항(蔡奎恒) 일파의 하부조직원으로, 채규항 검거 후 그의 가족과 함께 계림서점을 경영하였다.
홍원노동조합에 가입하여 당 조합의 좌익화에 힘썼고, 1931년 1월 2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 선고 후 다시 징역 4월 15일로 확정되자 탈출하였고, 같은 해 4월 함흥에 사는 이상희의 주선으로 소련에 입국하였다.
같은 해 하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1932년 5월 졸업하였고, 1932년 11월 상순 프로핀테른 극동책임자로부터 경성 중심의 적색노동조합조직을 위한 준비공작 지령을 받고, 같은 해 12월 귀국하였다.
함경남도 서호진 이기봉의 집에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본과 출신 김인극과 모의하고, 1933년 1월초 이기봉을 통해 당시 도주중이던 함남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격인 강목구와 접선하여 발행 중이던 공청기관지에 반전운동에 관한 논설 원고 게재를 부탁하였다. 그 후 김인극과 상경하여, 학생독서회를 보성고보 내에 조직하였다.
1933년 5월 메이데이 캠페인을, 동년 9월 종방쟁의를 배후선동 하면서, 여직공을 규하였고, 1934년 중순에는 여직공을 통해 경성제대 조수인 정태식과 알게 되고, 이를 통해 다시 경성제대 미야케교수와 만나 「메이데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적색노동조합 조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판단하고, 산업별 책임자를 선임한 후 다시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고자 모의하고, 총회를 개최 하였으나 동년 5월 19일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