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호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소련 연해주에서 태어나 하바로프스크 공산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강상호는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와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수립을 도왔다. 1959년 “김일성 체제가 독재체제로 치달아 정치제도가 마음에 맞지 않아서”라고 밝히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1990년 영어판 《모스크바 뉴스》는 강상호의 김일성 체제 비판 기사를 전재했다. 이 기사는 소련이 김일성 정권에 대해 획기적인 정책변화를 결정했음을 국내·외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북한 정권 수립 초창기 소련파의 일원으로 입북하여 활동하였으며, 1959년 말 소련파 숙청시기에 소련으로 망명한 후 소련 해체 직전부터 반 김일성 체제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 소련 연해주에서 태어나 하바로프스크 공산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30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입국하였으며, 6·25당시는 강원도당 위원장을,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북한 내무성차관을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망명동기에 대해서는 “김일성 체제가 독재체제로 치달아 정치제도가 마음에 맞지 않아서”라고 밝혔다.
소련군 상위 출신으로 해방 후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해 당중앙학교장, 내무성 부상 겸 정치국장,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수석위원을 지냈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반 김일성 활동을 벌이다 2000년 12월 1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김나제르다씨와 1남 3녀를 두었다.
김일성 일파는 만주에서 유격활동 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하였다. 김일성 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 강 유역의 비밀지역에 활동하다 해방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강상호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으로, 김일성을 처음 본 것은 김일성이 해방 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후였다. 강상호는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25전쟁 당시 강상호는 내무성 차관으로, 여러 명의 차관 중 당 정치교양사업 · 문화사업을 담당하였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1950년 6월 강상호는 지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하여 6월 25일 퇴원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중앙당 비서가 그날 새벽 전화를 걸어와 퇴원 즉시 내각에 참석하라고 연락하였고,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 최용건을 제외한 전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 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 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러한 김일성의 제안은 토론 없이 100% 찬성으로 통과하였다.
강원도당 회의를 통한 전쟁과업의 수행과 38선 이남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를 받은 강상호는 춘천으로 이동 중 38선 이남 남측 포대에 탄피가 몇 개 없는 점, 전선 이북지역의 집은 파괴되지 않았고, 농민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점, 미군이 전쟁 전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철수한 점 등을 근거로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전쟁 전 북한으로 국적을 바꾼 이들의 절반가량이 여러 구실로 처형 또는 숙청되었고, 강상호도 「개인숭배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내용의 논문을 내무성 신문인 『내무원』에 게재한 것을 이유로 혹독한 사상검토를 당했다. 그는 1959년 11월 소련으로 망명하여 북한 체제 비판 활동에 앞장섰다.
1990년 2월 14일자 영어판 『모스크바 뉴스(MOSCOW NEWS)』은 재소 한인동포 신문인 『레닌기치』에 실린 강상호의 김일성 체제 비판 기사를 전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0년 1월 5일 강상호는 소련 알마아타시에서 발행되는 『레닌기치』지 1989년 11월 30일 자에 실린 우제국(재 소련 한인 작가)의 북한방문기 “잊지 못할 상봉”이 북한 측 향응과 접대에 현혹돼 북한의 현실을 왜곡 · 미화했다고 하며 김일성 독재를 비판하였다. 강상호는 이 글에서 특히 “위대한 수령 · 인민의 어버이를 자칭하고 있는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인민학살독재자”라고 규정하고, “루마니아 독재가 차우셰스쿠의 패망에서 보듯이 독재자의 말로는 같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소련이 관영 언론인 『모스크바 뉴스』를 통해 북한체제를 비난한 것은 물론, 동맹국가 원수인 김일성을 ‘인민학살독재자’로 규정한 글을 보도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소련이 김일성 정권에 대해 획기적인 정책변화를 결정했음을 국내 · 외에 사실상 공개적으로 선언한 극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강상호는 1990년 6월 18일 당시 문화방송의 초청으로 해방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북한 정권의 성립과 6·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 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강상호는 또한 1992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국제안보 및 군축문제센터가 발행한 『믿을 수 없는 동반자들(Uncertain Partners) · 스탈린, 마오쩌둥과 한국전쟁』에서 6·25전쟁 전후의 북한 사정을 증언하며 이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고 밝혔고, 1992년 6월 모스크바에서 유성철, 박병율 등 6명과 함께 “6·25는 김일성이 일으킨 민족상잔 전쟁인데 거기에 참전 · 훈장을 받은 것은 창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아 6·25 참전 사죄 성명을 발표하였다.
강상호는 6·25전쟁 참전 공로로 북한정권으로부터 받았던 훈장을 “민족상잔을 일으킨 남침전쟁에 참전한 것이 부끄럽다”며 1992년 북한에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