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신라의 옛 위계사용을 탈피, 태봉(泰封)의 관계를 이어받아 919년(태조 2)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고려왕조 초기의 독자적인 공적(公的) 질서체제로서, 태조 왕건의 직속부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고려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조직한 문·무관의 위계였다. 이 관계는 936년 후삼국 통일을 전후해 완성되었으며, 원윤은 총 16관계 가운데 6품 상계(上階)로 10위에 해당된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었는데, 관계는 주로 비관인층(非官人層)·지방호족들만이 칭했고 중앙관인층은 문산계와 관계를 병용하여 점차 중앙과 지방, 관인과 토호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나아가 995년(성종 14) 문산계를 개편하고 무산계(武散階)를 처음 실시했는데 이 때 관계체제는 폐지되었다. 그래서 1076년(문종 30) 원윤은 정5품 문산계 중산대부(中散大夫)·조의대부(朝議大夫)로 나타난다.
그러나 관계체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뒤 향직(鄕職)체제로 원형대로 존속되어 고려의 독자적 질서체제로 자리잡았다. 한편 960년(광종 11) 3월 백관공복(百官公服)을 제정할 때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에 따라 자삼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받았으며 원윤은 이에 포함된다.
또 태조 때 내항(來降)한 토호들에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적으로 원윤 이상의 관계를 수여했으며, 북방경략을 위해 축성할 때 책임자는 대상(大相), 그 뒤 진두(鎭頭:守城 책임자)는 대개 원윤 이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후백제와 전투를 할 때 군대편성에서 마군(馬軍)의 지휘관은 대개 원윤 이상, 보군(步軍)의 지휘관은 원윤 이하로 편성되었다.
한편 성종연간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했며, 문·무관을 처음 구분해 자삼, 즉 원윤 이상에게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듯 원윤은 공복·전시과·사마(賜馬)·사계(賜階)의 기준이 되었으며, 관계 내에서 단종을 이루어 좌윤(佐尹) 이하와는 계층적으로 상하가 크게 격차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