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목판본.
권근이 1396년(태조 5)에 소위 표전문사건(表箋文事件)을 해결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갔는데, 명제(明帝)가 조선에서 명에 보낸 표전의 글귀 중에 불손한 말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글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소환하자, 그 글의 윤색(潤色)에 참여한 권근이 책임을 지고 자원하여 명에 들어가 의혹을 푼 것이다. 그리고 명제가 내어준 시제(詩題)에 따라 24수의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응제시이다.
권근은 1396년 9월 15일에 「왕경작고(王京作古)」 등 8수, 9월 22일에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 10월 27일에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의 6수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명제는 어제시(御製詩) 3수를 지어 권근에게 내려 주었다. 응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8수에서는 고려의 멸망, 조선의 건국과 사대, 사행길에 지나온 서경 · 압록강 · 요동 · 바닷길 등을 읊었다. 다음 10수에서는 동이 · 삼한 · 신라 · 탐라 등 역대 국가의 흥망과 금강산 · 대동강 등 명승을 노래했다. 마지막 6수에서는 명제가 베풀어 준 잔치에서의 흥취를 읊었다. 곧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적 입장에서 중국과 명제의 덕을 칭송하고,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응제시는 권근의 생존 시인 1402년(태종 2)에 명제의 어제시를 받은 영광을 기리는 의미에서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1438년(세종 20)에 중간되었으며, 『양촌집(陽村集)』에도 수록되었다.
권근이 명나라 태조에게 받은 어제시 3편과 명 태조의 명으로 지은 응제시 24편을 모아 1461년에 손자인 권람(權擥)이 주기(註記)를 붙이고 1462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서거정(徐居正)이 1470년에 약간의 보완을 가하여 복각(覆刻)하였다.
권람이 주석을 붙여 책으로 간행한 목적은 응제시를 권씨 일가의 가보로 삼아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의 역사인식을 전개하여 조부 권근의 역사관을 수정 보완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단순히 자구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사와 관련한 신화 · 전설 · 설화 그리고 역사지리에 관한 기록들을 이용하여 상당한 분량의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응제시주』의 주석에 인용하거나 참고한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기(古記)』 · 『도선기(道詵記)』 ·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 『동명왕편(東明王篇)』 · 『제왕운기(帝王韻紀)』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고려사(高麗史)』 등이다. 중국 자료로는 『요동지(遼東誌)』 · 『습유기(拾遺記)』 · 『속수신기(續搜神記)』 · 『신당서(新唐書)』 · 『주례(周禮)』 · 『문헌통고(文獻通考)』 · 『열자(列子)』 · 『위서(魏書)』 등이다.
『응제시주』의 주석에 이용된 자료는 정사(正史)보다 잡록(雜錄)이 많다. 또 실제 주석에서도 잡록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있다. 이 점을 보면 권람의 역사인식이 신화와 설화를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를 통해 조명간(朝明間)의 국교관계(國交關係)를 엿볼 수 있고, 특히 권람의 주기(註記)는 단순히 어구(語句)해석이 아닌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만큼 한문학(漢文學) · 역사학(歷史學) · 인문지리학(人文地理學) · 서지학(書誌學) 등의 연구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