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본은 저자의 둘째아들 권도(權蹈: 뒤에 권제(權踶)로 개명)가 세종 초년에 편찬 · 간행했으나, 오늘날 그 완전한 모습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대략 다음의 3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권도의 초각보인본(初刻補印本)이다. 권도가 이 책을 편찬한 뒤 곧 판각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나, 여기에는 서(序)나 발(跋)이 없어서 분명한 간행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책머리에 실은 세계(世系)의 부주(附註)에 의거해, 대략 1421년(세종 3)으로부터 1426년 사이에 이루어졌으리라고 추정될 뿐이다. 이 초각본은 권수에 세계와 연보 · 목록을 싣고, 다음에 명나라 태조의 어제시 3수를 수록하였으며, 본문은 첫머리에 응제시 24수를 비롯해 모두 40권으로 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는 이 초간본은 또 여러 곳에 보인한 것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판심(版心)에 서명을 ‘陽村文集(양촌문집)’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文集陽村(문집양촌)’이라고도 하였으며, 혹은 다만 ‘文集(문집)’ 또는 ‘陽村(양촌)’이라고만 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陽村文集(양촌문집)’이라 된 것도 양각(陽刻)과 음각(陰刻)의 두 종류로 구별된다. 아마 양각으로 ‘陽村文集(양촌문집)’이라 한 것만이 이 책 초각본의 원판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보인해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는 저자의 10대손인 권주(權儔)의 복각본으로, 진주에서 간행되었다. 여기에 있는 허목(許穆)의 중간서(重刊序)에서는 권주가 진주목사였던 남몽뢰(南夢賚)의 도움을 얻어 간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복각본은 책머리에 중간서 · 목록 · 연보를 싣고, 세계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역시 발문이 없어서 더 자세한 간행 사실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연보의 형식이 초각본과는 현저히 다르게 꾸며져 있으며, 모두 10책으로 분책되었다.
세 번째는 위의 복각본을 다시 복각한 것으로, 저자의 12대손인 권업(權0x9AA0)이 1718년(숙종 44)에 경상남도 아림현(峨林縣: 지금의 거창군)에서 간행하였다. 권업의 후지(後識)에 의하면, 이 책이 진주에서 중간된 지 거의 40여 년이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판본이 수재(水災)로 인해 태반이나 표실(漂失)되었고, 남아 있는 것조차 이지러져서 다시 인출(印出)할 수 없는 판본도 많았다. 그래서 다시 복각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 복각본은 처음의 복각본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도 상당히 많이 확인된다.
1937년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에서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3집으로 『양촌문집』을 출간하였다. 이는 초각본을 저본(底本)으로 영인해 40권을 7책으로 분책한 것이다. 1974년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단책(單冊)으로 영인 · 출간한 바 있고, 1979년 이래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이 책을 국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40권 10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 · 장서각 도서 ·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권1∼10에 시 980수, 권11∼14에 기(記) 45편, 권15∼20에 서 66편, 권21에 설(說) 13편, 전(傳) 3편, 권22에 발어(跋語) 21편, 권23에 명(銘) 7편, 찬(贊) 8수, 제문 13편, 권24에 사대표전(事大表箋) 21편, 본조표전(本朝表箋) 16편, 권25·26에 본조표전 12편, 사직전(辭職箋) 1편, 차자(箚子) 3편, 계본(啓本) 1수, 권27·28에 소어(疏語) 23편, 권29에 청사(靑詞) 14수, 권30에 교서(敎書) 9편, 권31·32에 상서(上書) 12편, 권33에 잡저 11편, 권34에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 권35에 동현사략(東賢事略), 권36∼38에 비명(碑銘), 권39·40에 묘지 5편, 행장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모두 980수인데,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원운(原韻)과 차운(次韻)은 포함되지 않았다. 문은 모두 305편인데, 「동국사략전」과 「동현사략」을 제외한 것이다. 잡저는 옥책(玉冊) · 애책(哀冊) · 사서(謝書) · 원문(願文) · 전부언(田父唁)이 각각 1편씩이고, 책문제(策問題)가 6편이다.
「동국사략전」은 신라 시조를 비롯해 주로 신라 역대 왕조에 관한 사실(史實)에서 저자 스스로 문제시된다고 생각되는 사항에 대해 자신의 비평적 의견을 서술한 일종의 사론집(史論集)으로서 모두 28개 항이 취급되었다. 「동현사략」은 허공(許珙) · 김방경(金方慶) 등 주로 고려 후기의 명현 24인을 뽑아서 그들의 간략한 사적을 적은 전기집(傳記集)이다. 이 책의 여러 곳에 보이는, 시부(詩賦)에 더한 자주(自註) 및 비지(碑誌) 등은 금석 문자와 함께 모두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권수에 실린 응제시 24수는 조선 초기 조명외교(朝明外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작품이다. 1396년(태조 5)에 자원해 명나라에 간 저자는 뛰어난 문학으로 이름을 중국에까지 떨치고 응제시를 지어 올리는 등 적절한 주선으로 문제되었던 표전문제(表箋問題)를 잘 해결해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태조의 어제시를 얻어내는 영광도 입었다. 이 응제시는 『삼국유사』 이후 처음으로 단군의 개국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도 중요시되고 있다. 이밖에 「은문목은선생문집서(恩門牧隱先生文集序)」를 비롯해 『도은집(陶隱集)』 · 『삼봉집(三峯集)』 등의 문집서와 시서(詩序) 등은 우리 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들이다.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서발(序跋)은 의약, 「주자발(鑄字跋)」은 활자 내지 인쇄술, 「천문도시(天文圖詩)」는 천문,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는 지리, 「논문과서(論文科書)」 · 「학칙발(學則跋)」 · 「제주향교기(提州鄕校記)」 등은 학교 · 교육 및 과거 제도 등에 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4편의 향교기는 당시 지방 학교의 실정과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좋은 기록이다. 이와 함께 「영주부서문루기(寧州府西門樓記)」와 「사불산미륵암중창기(四佛山彌勒庵重創記)」 등은 지방의 많은 고적 · 사찰 등 향토 유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다.
저자는 친구 정도전(鄭道傳)의 저술인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心氣理)』 3편, 『심문천답(心問天答)』 2편 등 여러 가지 척불문자(斥佛文字)에 유가류(儒家類)는 물론이고 노(老) · 불(佛)의 설까지도 널리 섭렵하여 인용하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매우 상세한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고, 여기에 서문이나 발문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 책에는 그 서문만 수록되어 있지만, 『심기리』 3편과 『심문천답』 2편은 뒤에 저자의 다른 저술인 『입학도설(入學圖說)』에 합편 간행되기까지 하였다. 이는 당시 사상계를 풍미했던 척불 사조를 잘 대변해 주는 저술로서 그 사상사적 자료의 가치가 높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