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삼성당으로 불려오다가 1472년(성종 3)삼성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의 “아사달(阿斯達)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라는 구절의 주(註)에는 “지금의 구월산.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이 지금도 있음.”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삼성사가 건립된 것은 고려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판단된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대종교 제1대 교주인 홍암대종사(弘巖大宗師)나철(羅喆)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제천의식을 올리고, 스스로 숨을 거두어 일제의 탄압에 항의하였다. 그러자 일본관헌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삼성사를 헐어버렸다.
삼성사에 관한 기록은 《춘관통고 春官通考》 등에 비교적 자세히 나오는데, 이를 연대순으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 태종 때 삼성당(三聖堂)을 폐하여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에 함께 모시니, 황해도 안에 나쁜 병이 퍼져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② 1428년(세종 10)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의 상소에 보면 “문화현(文化縣)은 신(臣)의 본향인데, 구월산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산의 동쪽 고개가 높고 크게 굽이쳤으며, 산허리에 신당(神堂)이 있으나 어느 때 세운 것인지는 모릅니다. 북벽에 단인천제(檀因天帝)를 모셨으며, 동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을 모셨으며, 서벽에 단군부왕(檀君父王)을 모셨으니 고을사람들이 삼성당이라 부르고, 그 산 아래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부릅니다…. 어떤 이는 단군께서 처음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셨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에 같이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나라를 세웠으니 기자에 이르기 천여년이 되는바, 어찌 기자묘에 함께 모시는 것이 옳겠습니까?”라고 하여 삼성당이 폐지된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③ 단종 때인 1452년(단종 즉위년) 경창부윤(慶昌府尹) 이광제(李光齊)는 상소문에서 앞에서와 같은 주장을 한 다음 삼성당의 신주봉안을 강력히 주청하였다.
④ 1472년 황해도관찰사 이예(李芮)가 왕명에 따른 복명(復命)형식으로 올린 장계에서 삼성당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삼성당을 복원하고 제사드릴 것을 간청하였다.
⑤ 이러한 간청이 있은 그 해 삼성당을 삼성사로 개칭하고 한인·한웅·단군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였으며, 평양 단군묘의 예에 따라 해마다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⑥ 1765년(영조 41) 왕명으로 삼성묘(三聖廟)에 나무함[櫝]을 마련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먼저 성종 때 삼성묘를 세울 때, 위판을 흙으로 만들었더니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졌으므로, 예관(禮官)을 보내어 나무로 독(櫝)을 만들었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 이외에도 1781년(정조 5) 왕이 축문(祝文)을 보내어 제사지냈다는 등의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숭조보본(崇祖報本)의 전통적 사상이 민족의 시조라 여겨지는 단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